현대과학과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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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들 책은 많이 보셧는지요.
좀 어려운 내용이라 많이 못보셨을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발제이니 이해한만큼 최대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김재권 박사의 책 "물리주의"는 제가 관심이 있는 주제에 대해 상당히 의미있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어쨌든 의미있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금요일 7시(조금 넘어) 도룔동 "리브리스"에서 뵐께요^^

많은 관심 바랍니다 

  • profile
    주민수 2012.03.14 02:59
    김재권박사의 "physicalism"을 "물리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번역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physicalism"이라는 용어는 "노이라트의 배"로 유명한 오토 노이라트에 의해 20세기 초반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른바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물리학의 언어야말로 과학의 보편적 언어이며 모든 지식은 물리학적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만큼 그의 "physicalism"을 "물리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김재권박사의 "physicalism"도 과연 "물리주의"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인지는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물리학적 객관성을 중시하는 분석철학에 관련된 노이라트의 "physicalism"과 달리, 심리철학과 관련된 김재권박사의 "physicalism"은 "mental"이라는 개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physical"이라는 단어는 /신체적/물질적/물리적/실재적/ 등 여러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mental"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physicalism"이라면 "물리주의"보다는 오히려 "신체주의" 또는 "물질주의"라는 번역이 더 다탕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면 과연 지나친 생각일까요?
  • ?
    한정규 2012.03.14 02:59
    김재권선생님의 저서를 주로 번역하시는 하종호 선생님께 여쭤보는 것은 어떤가요? 구체적인 설명과 이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물질주의라는 말이 이미 철학용어로서 합의되어 쓰이고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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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준호 2012.03.14 02:59
    제 생각에...
    김재권 박사가 심신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물리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주박사님은 철학에 대해 참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언젠가 뵐 수 있길...
  • profile
    주민수 2012.03.14 02:59
    어느 날 누군가 피타고라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그러자 피타고라스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저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philosopher)"일 뿐이라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안팎의 두 무리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바깥쪽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들을 쪼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알고자 하는 것들에 자연과학, 인문학 등의 이름을 붙이고는 전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안쪽 사람들도 마침내 알고 싶은 것들을 쪼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알고 싶은 것들에 언어철학, 과학철학, 심리철학 등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안팎의 관심거리가 같은데도 불구하고... 이중에서 잠깐 심리철학의 심신문제를 (제가 엄박사님의 10번 글에 댓글로 단 독립성 검사를 통해) 살펴보면 '마음'이 '몸'에 종속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종속된 존재인 '마음'이 종속시킨 존재인 '몸'에 거꾸로 인과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심리철학의 고민인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물리학은 아직 이런 "능동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심도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만...

    책을 읽을 때면,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이 책의 주제나 문제를 나라면 과연 어떻게 풀어낼까 하고 생각하며 읽곤 합니다. 평소 김재권박사의 수반철학이라는 주장에 관심이 많아서 그가 저술한 심리철학 관련 서적을 나름대로 밑줄 그어가며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김재권과 물리주의>를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제 주문했습니다. 엄박사님, 김재권박사의 물리주의를 과연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마저 읽어보고 나서 얘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 ?
    엄준호 2012.03.14 02:59
    저도 '김재권과 물리주의'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겠지만 김재권 박사의 기능적 환원주의가 뭐 그리 색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환원이론에 비해 그것이 그리 뛰어난 이론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거니와 그런 주장이 그의 독창적 생각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만...
  • profile
    주민수 2012.03.14 02:59
    심리철학의 책을 읽다보면 가끔 책속의 논리에 당황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논리학의 형태를 취할 때는 더욱 힘들어 지는걸 느끼곤 합니다. 본래 수학이란 것이 자연과학이 아닌지라 내용이 없는 형식의 문제만을 다루고 따라서 진리성이 아니라 타당성 밖에는 논할수 없다는 약점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망각하면 우리를 엉뚱한 결론으로 데려가곤 하지요.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심리철학의 문제 풀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악!"이라는 비명을 발하는 사람과 "아하!"라는 감탄사를 발하는 사람의 차이는?
    전자가 물리적 반응을 보였다면 후자는 심리적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일단 입력된 자극이 각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메커니즘을 거치는지 살펴본다면 물리적 반응과 심리적 반응의 차이를 정량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에 대한 모형을 세울수 있다면 또 한단계 발전할 것일테고...

    자극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표현 대신에 'c-신경'의 발화라는 표현이 더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언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다음의 예화에서 이러한 차이의 의미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눈앞에서 불빛이 반짝였습니다. 플라톤은 <유성의 흐름>이라고 말했고 옆에 선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딧불의 비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플라톤의 눈에서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서도 모두 똑같이 열두 번째 망막세포가 발화되었다는 것을 뒤에 선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플라톤은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캄캄한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 ?
    한정규 2012.03.14 02:59
    자극의 고통의 원인보다 c-신경의 발화라는 게 더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왜 이해가 안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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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수 2012.03.14 02:59
    심리철학의 책을 읽을 때마다 '두뇌의 C-신경섬유'라는 표현이 참으로 그럴듯 해보이는 모양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전문용어(jargon)의 마력이라 봅니다만...

    앵무새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생각한다고 믿는다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겠지요? 물리적 반응과 심성적 반응 사이에는 이렇게 주의를 요하는 혼동이 많아 보입니다. 단순히 과학의 용어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과학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서인데 결국 과학적 사고의 수반 여부가 관건이겠지요.

    일례로 '고통'과 '통증'의 구별 문제가 있습니다. '통증'은 물리적 속성인데 반해 '고통'은 심성적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산보하던 주인과 강아지가 정신을 잃은뒤 깨어나 보니 철로에 묶여 있습니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울리면, 강아지는 조여드는 밧줄로 인한 '통증'에 몸부림치겠지만, 주인은 보이지는 않지만 다가오고 있는 기차로 인한 '고통'에 몸부림 칠테니까요. (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잠시후 식은 땀을 흘리면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참고로, '유령통(phantom pain)'이라는 증세가 있는데 이 경우가 '통증'과 '고통'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줍니다.

    '통증'의 경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극이 일으킨 전기화학 작용이 시냅스의 문턱값을 넘어서면서 시작되는 생명체의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통증'이라고 표현되었다면 이는 신경세포에서 일어난 단순한 자극-반응의 관계를 지나 흔히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범주에 속하는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느낌'의 문제는 바로 '감각질(qualia)'의 문제를 의미하고요. 김재권의 수반이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기능주의 환원론의 절반의 실패는 바로 이 감각질의 문제가 수반이론 바깥으로 새어 나온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심신 수반 이론'은 '심신 1원론'이 아니라 '심신 1.5원론'으로 봐야 한다고 꼬집는(?)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결국 이 모두가 '창발성'에 대한 미흡한 이해에서 비롯된다는게 제 개인적 소견입니다.

    다시 말해, 중요한건 '감각'과 '지각'이 다른 얘기라는 거지요. 또다시 '창발성'의 얘기로 돌아가겠지만... 사실 '창발성'은 '무지(無知)의 미화(美化)'로 오인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창발성'의 의미에 대해 좀더 깊은 얘기를 나눈다면 오해의 안개가 걷히리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