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철학

2012.04.15 21:05

슈뢰딩거의 고양이

조회 수 2532 추천 수 0 댓글 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차원인 선(線) 위에서 살고 있는 '선충(線蟲)'이 존재한다면 그는 자신이 '곧은 선'인 직선 위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굽은 선'인 원호 위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굽은 선은 2차원이므로 1차원의 생물로서는 그보다 높은 차원인 2차원의 속성을 알 길이 없다고 수학자인 괴델은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주장합니다만.?

물리학적으로 1차원의 '곧은 동선(動線)'이 2차원의 '굽은 동선(動線)'이 되기 위해서는 '포텐셜'을 필요로 합니다. 포텐셜은 '라그랑지안'이라는 물리학적 개념을 통해 운동 궤도의 곡률을 결정합니다. 즉 포텐셜이 곡률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공간상의 운동에 대한 해석을, '포텐셜'이라는 물리학적 개념을 사용해서 고전적 라그랑지안 역학으로 설명하든 아니면 '곡률'이라는 기하학적 개념을 사용해서 현대적 상대론으로 설명하든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 얘기가 됩니다.?

물리적 상태는 차원을 통해 표현이 가능합니다. 단, 차원의 축을 이루는 요소들은 서로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배타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독립성이란 상대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하며,?또한 상대가 있다면 상대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만약에 차원의 축을 이루는 요소들이 서로 배타적이라면?동시에 존재할수 없습니다. 차원을 형성하는 요소의 독립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독립적인 요소만이 차원을 형성하는 축인 이른바 '기저(basis)'의 역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동(東)'이 없이는 '서(西)'도 없습니다. 또한 동(東)과 서(西)는?동시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동(東)과 서(西)는 서로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東)'이 없어도 '남(南)'은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동(東)과 남(南)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東)과 남(南)은 서로 독립적이고 따라서 서로 다른 차원의 축, 즉 별개의?좌표축을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동(東)과 서(西)는?1차원을 이루고 동(東)과 남(南)은 2차원을 이룹니다.

그렇다면 '생(生)'과 '사(死)'는 어떨까요?
'생(生)'과 '사(死)'는 과연 서로 독립적으로 다른 차원의 축을?형성하는?요소일까요??
'생(生)'과 '사(死)'가 독립적일 때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의미있는 문제가 될 수 있을텐데...

  • ?
    이병록 2012.04.15 21:05
    동쪽을 바라보면 그 오른 쪽이 남쪽인데 동이 없어도 남이 존재한다? 조금 난해합니다...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동남향'이라는 방향은 있지만 '동서향'이라는 방향은 없습니다.
    (동/서)는 가로축을 그리고 (남/북)은 세로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동/서)는 두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차원의 양끝>을 나타내며 서로 배타적입니다.
    다시 말해 (남/북)이라는 세로축의 사용을 위해 (동/서)라는 가로축이 꼭 선행될 필요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 ?
    이기두 2012.04.15 21:05
    "동(東)과 남(南)은 서로 독립적이인데, 동(東)과 서(西)는 서로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에서, 동(東)과 남(南)의 관계에 대하여 동(東)과 서(西)의 관계가 다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 ^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동(東)은 가로축 방향의 한 끝이고 남(南)은 세로축 방향의 한 끝입니다.
    서(西) 또한 가로축 방향의 다른 끝으로 동(東)과 같은 축의 반대 방향을 나타내지요.
    다시 말해, 동(東)과 남(南)은 직각의 축을 이루는 두개의 다른 차원이지만
    동(東)과 서(西)는 직선의 축을 이루는 한 차원의 다른 값으로 서로 배타적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동 명령 후의 <가능한>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독립성의 의미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1)동쪽으로 10m 이동하라.
    (2)서쪽으로 10m 이동하라.
    (3)동서쪽으로 10m 이동하라.
    (4)동남쪽으로 10m 이동하라.
  • ?
    엄준호 2012.04.15 21:05
    '생(生)'과 '사(死)'가 독립적일 때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요?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상자속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상태함수가 서로 배타적인 <생/사>를 '기저basis'로 해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상태함수의 중첩과 붕괴에 대해 슈뢰딩거가 고안해낸 사고실험이지요. 그런데 이 상황이 일반적인 물리학적 경우들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약간 특이한 이런 상태함수의 표현에 사용된 <생/사>라는 '기저basis'의 적합성(?)을 한번 살펴보자는 의도입니다.

  • ?
    엄준호 2012.04.15 21:05
    생과 사의 관계가 동서관계와 유사한 것 같지만 사실 단세포생물에서는 생이 필연적으로 사를 수반하지 않으니 생과 사는 본질적으로 독립적인 것 같습니다. '사'는 복합한 조직을 만든 다세포생물만의 문제이니까요. 하지만 고양이는 다세포생물이니 생과 사의 관계는 동서관계와 유사하지 않을까요?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고양이의 생/사가 동/남보다는 동/서에 가까운 개념쌍이라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단세포 생물의 생/사 문제가 독립적으로 보인다는 의견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모세포와 딸세포의 분화 문제는 결국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인천백북스의 '테세우스의 배'라는 게시글을 통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얘기해 보려고 했었지요.
  • ?
    엄준호 2012.04.15 21:05
    모세포와 딸세포의 분화 문제는 결국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위의 글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안되서요^^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생/사의 관점을 의식의 변화 과정에까지 확장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사고실험적 측면입니다.
    즉, 정체성의 본질이 외양이 아니라 의식에 있다면 의식의 소멸을 정체성의 사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1) 유충이 우화(羽化)하여 성충이 될 때 의식 문제도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까요?
    (2) 모세포가 두 개의 딸세포로 분화할 때 모세포의 의식 문제는 어디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까요?

  • ?
    엄준호 2012.04.15 21:05
    주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정체성의 문제'는 '자아의 문제'로 이해됩니다. 인간과 같이 의식을 가진 생물에서 자아는 '육체적'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의식은 자아를 형성하는 토대입니다. 따라서 인간과 같은 존재에서 의식을 상실한다는 것은 '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의식의 소멸'을 '사'로 볼 수 있지 않냐는 박사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곤충이나 세포에 대해 의식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지 비유를 하신 것에 불과하다면 문제없지만...

    자 이제 그러면
    고양이와 같이 의식이 있는 다세포생물에서 '생과 사', '의식', 그리고 '자아(정체성?)'의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돌아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1) 생과 사는 동서관계이니 각각 개별적인 상태함수를 구성할 수는 없고 따라서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하기 위한 사고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적절한 것이 아니겠군요

    2) 다른 한편으로 아래 논리가 타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주 박사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일부 학자들(존 설 포함)은 의식의 '비결정성'에 근거하여 의식을 양자역학적 현상이라 규정하고 의식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어떤 물리적 요소들의 양자역학적 특성이 '의식 있음'을 만들어내고
    '의식 있음'이 양자역학의 상태함수로 표현될 수 있다면
    '생'이 개별적인 상태함수를 갖지 못한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나요?


    사족) 주 박사님의 추천덕분에 최근 존 설의 '마인드'를 다 읽긴 했습니다. 읽어보니 박사님의 생각이 존 설에게 많이 빚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존 설의 논리는 제게 잘 와닿지 않는군요. 그리고 '마인드'를 읽다가 알게 된 또 한가지 사실은 제가 전에 존 설의 책을 하나 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신경생물학과 인간의 자유'(궁리)로 제가 자유의지에 대해 한참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읽었었는데 저자가 존 설 이었는지는 기억을 못했습니다. 그때에도 별로 저자의 주장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나봅니다.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사실 존 써얼과 같은 심리철학자들의 '의식'이라는 개념의 사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비의식이 더불어 정의되지 않은 의식은 무의미한데, 막상 무의식/비의식을 정의하려다 보면 기존의 의식 외에 <또다른 의식>의 정의가 추가로 필요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심리철학자/인지과학자/뇌과학자가 회피하는 문제입니다.
    사실은, '분산되는 의식'이라는 현상때문에 기존의 '의식'이란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만...

    그런데 어쨌든 굳이 '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학습 가능성'을 의식의 지표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비록 곤충이라 하더라도 학습이 가능하다면 일단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지요.

    1)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실 <생/사>라는 개념쌍은 <동/서>라는 개념쌍과는 다른 종류입니다. <동/서>는 상반 관계인 반면에 <생/사>는 모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보어는 모순 관계에 있는 개념쌍을 포용하기 위해 '상보성'이라는 나름의 철학을 전개합니다. 따라서 상보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생/사>를 상태함수로 삼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비유가 오히려 적절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한편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에 문제점이 있다는 슈뢰딩거의 비판에 저는 동감을 느낍니다.

    2) 생명 현상의 기본적인 부분에 대한 거시물리학의 설명조차도 아직 충분치 못한데 하물며 의식을 포함하는 생명 현상을 미시물리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생명 현상을 위해 양자역학이 디지털 시스템이라는 물리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정도가 미시물리학의 기여에 대한 현재 제 이해의 범위입니다. 아레니우스 포텐셜이 시간이라는 문제를 풀수 있는 열쇠라는 생각도 더불어 하고 있긴 합니다만...

  • ?
    이기두 2012.04.15 21:05
    "1차원인 선(線) 위에서 살고 있는 선충(線蟲)이 존재한다면," 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에서 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1차원인 선(線) 위에서 살고 있는 선충(線蟲)은 수학적으로는 1차원에 갖혀서 다른 차원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는데, 그것은 수학적인 가정이지, 슈레딩거의 역설은 물리계의 실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거니까, 물리계에 이런 실체가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실체 중에 가장작은 입자인 중성미자도 약력으로 다른 실체와 상호작용한다고 하면, 이런 1차원에 갇힌 예쁜꼬마선충도 다른 차원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
  • ?
    엄준호 2012.04.15 21:05
    학습가능성을 '의식'의 지표로 삼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알기로 초파리는 물론 플라나리아도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동물들에도 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물론 의식을 그런식으로 정의한다면 정의에 부합되는 의식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얼마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왠만한 컴퓨터에는 학습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데 그런 컴퓨터도 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의식에는 등급이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등급 개념을 적용한다면 학습 능력을 갖춘 곤충의 경우에도 의식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컴퓨터의 학습 능력은 제한적이라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에델만의 경우를 보면 과학자답게 의식에 등급을 매깁니다. 그런데 의식의 등급 문제는 생명체의 등급 문제로 치환이 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데넷은 복잡한 의식의 구분을 원치 않는 철학자답게 의식의 등급 대신에 생물의 등급을 이용하여 주장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의식에 등급이 있는게 아니라 등급을 갖지만 의식과는 다른 '무엇인가 또다른 존재'인 '미의식'이 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의식은 주체라는 개념과 상통합니다. 즉, 의식이란 생명체로 하여금 하나의 통일된 개체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찌 보면 의식이란 통일된 적응 능력을 달리 일컫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의식의 등급이라는 개념을 통해 에델만이 주장하는 '고차 의식'이나 데넷이 주장하는 '그레고리 생물'은 사실은 '의식'이 아니라 '의식'보다 높은 상태인 '마음'에 대한 오인이라고 저는 봅니다. 인식에 관여하는 저급(?)의 의식과 재인에 관여하는 고급(?)의 마음은 '지각의 수준'에 따라 구분되는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습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으례 로봇의 얘기가 따라나오는 걸 보게 됩니다. 학습은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의식은 생명을 바탕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학습은 생명을 바탕으로 즉 개방된 환경에서 독립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물질 대사'와 '정보 대사'가 결합된 개방된 독립 과정으로 저는 정의합니다. 그런데 현재 수준의 로봇이 보여주는 학습은 개방된 독립 과정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제한된 환경에서 초기화에 끊임없이 의존하는 경우로 단지 학습 알고리듬의 구현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래서 현 수준의 로봇의 학습은 진정한 의미의 학습으로는 볼 수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단, '월-E'라는 영화에 나오는 '월-E'와 같은 로봇이라면 물질 대사와 정보 대사를 갖춘 개방된 독립 과정을 유지하므로 생명으로 볼 수 있겠고 따라서 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 ?
    엄준호 2012.04.15 21:05
    에델만은 의식을 일차의식과 고차의식으로, 다마지오는 핵심의식과 확장된 의식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좀 다른 관점에서 의식과 마음을 구분하시는 것 같습니다.
    박사님 덕분에 한동안 제쳐두었던 '의식 문제'를 다시 꺼내야겠네요^^

    제가 보기에
    1. 의식은 '느껴지는 것'입니다.
    2. 마음은 자각된 의식상태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각된 앎'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자아를 필요로 합니다. 기억은 마음의 필수요소이고 마음을 끝없이 확장시킵니다. 또 기억은 '시간개념'도 낳았습니다.
    3. 지각, 기억, 앎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습니다.
    4. 따라서 의식에는 분명 어떤 적응적 잇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마도 박사님께서 언급하신 목표지향적 행동에 필요한 '통일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5. 의식은 마음, 자아 등의 토대이며, 행동의 통일성, 행동의 계획 등을 정교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입니다.

    *** 위의 글에서 저는 마음을 좀 좁게 해석했습니다.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왜 에델만이나 다마지오 같은 학자들이 의식을 구분하려고 했을까요?
    그리고 왜 데넷은 의식의 구분 대신에 생물을 구분했을까요?
    생물학의 입장에서는 상동(?)의 생물보다는 의식에 차이를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한편 철학의 입장에서는 상동(?)의 의식보다는 생물 자체에 차이를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결국 이러한 차이는 생물학과 철학이 '진화'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구분의 시도는 모든 생물의 의식을 한 시각으로 본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하나로 묶이지 않는 이유는 개체내의 이질성과 개체간의 이질성이라는 의식의 두 이질성 때문입니다.
    개체내 의식의 이질성이 공통으로 발견되는데 반해 개체간 의식의 이질성은 인간이 주원인입니다.
    당연히 두가지 이질성을 함께 비교해 본다면 통일된 개념 체계를 만들어 볼 수 있겠지요?
    엄박사님, 언젠가 시간이 되면 인지과정을 바탕으로 제가 만들어 본 의식/마음 모형을 소개할까 합니다.

  • ?
    엄준호 2012.04.15 21:05
    1. "생물학의 입장에서는 의식에 차이를 두고 철학의 입장에서는 생물 자체에 차이를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위와 같은 말씀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큰 의미가 있는지도...
    의식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당연히 인간과 다른 동물간 의식의 질적 차이를 생각해볼 것이고. 분명 차이가 있을테니 이를 구분하려 할 것인데.
    생물학자들은 동물간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의식을 구분하고
    철학자들은 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동물을 구분한다...
    이것이 양 학문에서 진화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 때문인가요?
    생물학자들도 동물간 차이를 염두해둔 것이고 결국 기존의 분류체계에 의식 특성을 편입시켜 동물의 진화과정에서 의식/마음의 진화를 설명하려 할텐데요.
    결론은 비슷해지지 않을까요?

    2. "어쨌든 이러한 구분의 시도는 모든 생물의 의식을 한 시각으로 본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하나로 묶이지 않는 이유는 개체내의 이질성과 개체간의 이질성이라는 의식의 두 이질성 때문입니다. 개체내 의식의 이질성이 공통으로 발견되는데 반해 개체간 의식의 이질성은 인간이 주원인입니다."

    데넷이나 에델만 등은 의식의 종간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개체내 또는 개체간 차이를 말씀하시니 헷갈리네요.
    제 생각에 의식이 위와 같이 여러가지로 구분되는 이유는 의식의 질적 차이때문이고 이는 동물의 진화과정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동물간 또는 종간 차이를 말하는 것인듯 합니다만...

    박사님 말씀을 이해하려면 아마 박사님이 생각하시는 의식/마음 모형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할 것 같습니다^^
    하여 조만간 대전 또는 인천에서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는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만족하므로 전자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중에는 가끔 이렇게 엉뚱한 쪽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기 전공이 아닌 경우에는 인용의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생물학과 철학 사이에도 이러한 오류가 있는듯 싶다는 말이지요.

    엄박사님, 의식의 구분과 관련된 문제는 '상동적 차이'와 '상사적 차이'에 대한 혼동이 생각보다 쉽고 심각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는게 제 요점입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글보다는 만나서 의견을 나누는게 의사 소통이 원활할듯 싶습니다만...^^

    어쨌든, 어떤 '의식 모형'이 만들어진 경우에 그 모형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저는 유령통의 문제와 몽유병의 문제 그리고 다중인격의 문제를 꼽습니다. 만일 제대로 정립된 의식 모형이라면 적어도 이 세가지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가끔 다른 이들이 주장하는 의식 모형을 이 문제에 대입해 보곤 합니다만 아직까지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아 보입니다. 이 세가지 문제를 생각할 때면 신체와 정신의 문제로 고민했던 데카르트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
    엄준호 2012.04.15 21:05
    죄송하지만 의식과 말씀하신 세가지 문제와의 관계를 좀 설명해주실 순 없나요?
  • profile
    주민수 2012.04.15 21:05

    라일이라는 철학자가 '기계속의 유령'이라고 빈정댔던 데카르트의 심신모형을 선뜻 부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예 중의 하나가 다중인격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한 신체에 여러 인격체가 공존하면서 서로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는 경우인데 전에는 이러한 증상이 환자나 범인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연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됐었습니다. 그러나 인격체가 바뀔때 신체의 생리적 조건인 체질까지 함께 변화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다중인격의 문제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의학적 증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의식이라는 존재가 집의 주인처럼 신체의 통일성과 관련된 존재라면 다중인격은 과연 한 신체에 통일성이 여럿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의식은 때로 이러한 '독특한 다수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는 기억과 관련된 문제라고 밀어붙일 수도 있겠지만 과연 기억이 체질조차 바꿀수 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몽유병은 수면 상태와는 다른 경우로 이 경우는 마치 진짜 집주인이 출타한 사이에 '베이비시터(?)'가 주인 행세를 하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수면의 경우와 공통된 점은 사건이 일어난 동안 집주인인 '의식'의 알리바이를 찾을수 없다는 점으로, 의식은 때로 이러한 '독특한 부재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는 무의식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무의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식의 쌍둥이>가 존재하는지 의문입니다.

    유령통이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지체의 통증을 느끼는 경우로 이 경우는 마치 의식이 신체와 별개로 인식하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의식은 신체와 독립적인 인식의 존재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의식은 또한 이러한 '독특한 독립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도 기억과 관련된 문제로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이는 실재성의 문제를 의식에서 기억으로 책임전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 ?
    엄준호 2012.04.15 21:05
    홈페이지 접속이 안되 댓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1. 유령통
    제 생각에 환상사지(phantom limbs)라고도 하는 이 정신질환은 신체와 별개인 의식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뇌과학적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팔이 절단된 사람이 계속 팔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1) 팔을 인식하는 뇌부위가 얼굴 피부에서 오는 감각을 인식하는 뇌부위와 가까이 있고
    2) 더 이상 팔에서 신화를 받을 수 없는 팔 인식 뇌부위가 근처에 있는 얼굴 감각 뇌부위와 시냅스 형성(연결됨. 일종의 뇌 가소성)
    3) 얼굴 감각 신호가 들어오면 얼굴 감각 뇌부위 뿐 아니라 팔 인식 뇌부위에도 신호가 들어가게 되고 그 결과 상위 뇌 영역에서 팔이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

    2. 몽유병
    제가 알기로 인간 행동의 대부분(95% 이상)은 의식없이 이루어집니다.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행동이 의식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즉 의식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고 왜 의식이 필요한가가 문제입니다. 의식은 ‘스포트라이트’ 같은 것이라 어느 순간엔 커졌다나 또 다른 순간엔 꺼집니다. 사실 경험적으로 보면 우리의 의식은 계속 순간적으로 꺼졌다 커졌다 하는 것 같습니다.
    의식에서 중요한 의문은 “의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의식이 왜 필요한가?”입니다. 첫 번째 의문은 어려운 문제이고 두 번째 의문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의식을 만들므로써 더 많은 정보를 ’통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 다중인격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의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아” 또는 “정체성”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두 마음”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두 개의 반구를 연결하는 뇌량을 절단한 분리뇌 환자는 두 개의 자아(인격)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이 하나의 “나”만을 경험하는 것은 뇌량을 통해 양쪽 반구의 정보들이 통합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중인격 환자는 어떤 원인에 의해 이러한 통합이 방해받게 된 결과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결론적으로 주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의식의 독특한 “다수성”, “부재성”, 그리고 “독립성”은 현재의 뇌과학 지식으로도 상당히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박사님의 의문을 잘못 이해했나요. 어쨌든 박사님의 의식모형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궁금합니다. 빨리 듣고 싶습니다. 저도 사실 의식모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저 나름 의식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이야기할 날을 고대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5 인간존재의 의미는 있는가 없는가? 1 김봉영 2012.06.18 2243
34 <과학철학의 역사>를 읽고-3 27 주민수 2012.06.16 2674
33 근본에 대한 대담 3 이정해 2012.06.11 2005
32 <과학철학의 역사>를 읽고-2 주민수 2012.06.05 2029
31 6월 주제도서 관련 9 엄준호 2012.06.05 2097
30 5월 모임 후기 1 엄준호 2012.05.28 1951
29 5월 모임 공지(5월 25일, 금) 6 엄준호 2012.05.23 2164
28 <과학철학의 역사>를 읽고-1 2 주민수 2012.05.21 2196
27 물리학을 전공한 멘토를 찾습니다 1 엄준호 2012.05.17 1932
26 데카르트의 시험문제 7 주민수 2012.05.11 2167
25 [전재] 생명원리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2 file 현영석 2012.05.05 1860
24 4월 모임 후기 9 엄준호 2012.04.22 2066
23 발제자료 '경영에서 생명시스템사고 활용' 현영석 1 file 현영석 2012.04.20 1926
22 "현대과학과 철학" 4월 모임 공지 엄준호 2012.04.18 1977
» 슈뢰딩거의 고양이 22 주민수 2012.04.15 2532
20 현대과학과철학 소모임에 관심이 있습니다. 3 성병한 2012.03.28 2313
19 과학이라는 이름의 미신? 17 주민수 2012.03.27 2664
18 5월 주제와 관련하여 5 엄준호 2012.03.23 2238
17 김재권 박사의 '물리주의'에 대하여 15 엄준호 2012.03.23 2932
16 과학과 철학에 대한 단상 6 주민수 2012.03.18 262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 5 Nex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