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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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찰스 버치(C. Birch)와 존 캅(J. Cobb)이 공저한 <생명의 해방>(3장)과 그리고
에리히 얀치(E. Jantsch)의 명저인 <자기조직하는 우주>라는 두 책에서 나름대로 취합해본 내용들이다.



첫 번째 책은 생물학자와 철학자 간의 공저로 둘 다 화이트헤디안에 속하며,
두 번째 책은 물리학자인 얀치가 동료인 일리야 프리고진(I. Prigogine)에게 헌정한 저서인데,
이미 둘 다 국역판으로도 나와 있는 좋은 책이며, 원저는 다음과 같다.
1. The Liberation of Life: From the Cell to the Community
2. The Self-Organizing Universe: Scientific and Human Implications of the Emerging Paradigm of Evolution.



생명을 이해하는 4가지 주요 모델




1. <기계론적 모델>로 보는 생명 이해


자연과학자들 중에는 생명체 혹은 생명체의 활동을 기계로 보는 이들이 꽤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뇌나 의식 혹은 마음 등 이러한 것들을 기계로 명명하기도 할 정도다. 생명을 기계론적 모델로 보는 이해에서는 궁극적인 구성 성분들(즉, 전자와 양자 그 밖에 근본적인 입자들)이 기제를 통제하고 벽돌쌓기를 통해 생명체를 만들어간다는 식의 이해가 매우 강하다. 세포는 일종의 벽돌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기계론적 모델은 궁극적 구성성분이 입자이며, 정확히 물질의 조각으로 이해된다는 가정과 상관된다. 입자를 지배하는 원칙은 기계학의 법칙이며, 기계 같은 행동은 완전히 결정론적인 방향으로 유도되어진다. 그리하여 기계론, 유물론(물질주의) 그리고 결정론은 대체로 한 세트로 이해되는 연관된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생명을 기계론적 모델로 보는 관점은 ‘생명=기계’로 여기는 부분적인 근거를 최종적 확신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관점 역시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형이상학 신념에 속하는 요청적 믿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인과 법칙을 따져묻는 과학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들이 은연중에라도 그 자신의 무의식적 전제로도 작동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생명 모델을 동물의 행동에 적용할 경우, 해당 동물은 그 구성 성분에 의해 완전히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보는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만에 하나 결정론을 주장한다면, 그들 자신도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인간에게도 근본적으로 독보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를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생명을 발생시킨 첫 발생 원인자로 무한소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은 빅뱅 때부터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인가?



알다시피 결정론에는 생명의 자유가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에 바로 이 문제로 많은 학자들이 골 아픈 논의들을 벌려놓기도 했었다. 기계론적인 생명 모델에서는 진화가 어떤 길로 흘러갈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문제임에도 이 역시 프로그램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결정론과 미래에서 대한 책임적 선택 사이에는 일종의 모순이 존재하며, 이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한 깔끔한 해결을 바라고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한편으로는 과학자들도 인간은 부분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철학적 신념에 따른 일관된 기술이나 모순적 민감성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생명은 기계’라고 보는 기술(description)을 쓰기도 한다.

서양에서 기계론적 모델의 역사는 데모크리토스, 에피큐로스, 루크레티우스 같은 고대의 저작들에서도 발견되어질 만큼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관점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서양 문화권에서는 매우 주류를 이루어왔었다. 그에 비하면 동양문화권의 경우는 생명을 보는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이 거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2. <생기론적 모델>로 보는 생명 이해

생기론적 모델은 생명체가 물리적 원자와 분자 더하기 생기, 생명력, 엘랑 비탈(elan vital, 생명의 약동), 엔텔레키(entelechy, 활력) 등 다양하게 불리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지닌 또 하나의 실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이다.



생기론 역시 고대의 학설로서 2세기 경 갈렌(Galen)의 생기론적 관념이 중세 기간 의사들에게 받아들여졌었다. 근대에 이르러선 프린시스 글리슨(F Glisson), 마르셀로 말피기(M. Malpighi), 게오르그 에른스트 스탈(G E. Stahl) 그리고 엔텔레키를 제안했던 19세기 발생학자인 드리슈(Driesch) 등이 주장한 바 있다.



철학에서 보면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Bergson)이 아마도 대표적일 것이다. 베르그송의 엘랑비탈 개념은 생기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철학적 뒷받침이 되기도 했었다. 또한 영국의 동물학자인 러셀(E. S. Russell)도 발생과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개념을 환기시킨 바 있고, 두 명의 미국 생물학자인 E. W 사이노트(Sinnott)와 R. S. 릴리(Lillie) 역시 이러한 쟁점을 부각시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줄리언 헉슬리(J. Huxley) 역시 논평한 바 있듯이 발생과 진화를 엘랑비탈 덕으로 돌리는 생기론자들은 생명의 역사를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여전히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생기론은 생명체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물질적인 것 더하기 비생명체에 없는 어떤 부가적인 생명의 특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핵심적 한계가 노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기계론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물질 성분들에 대한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생기론에 비해 기계론은 적극 해명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볼 때 과학자들에게는 생기론보다는 적어도 기계론이 좀 더 매력적으로 이끌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3. <창발적 진화론> 모델로 보는 생명 이해


창발적 진화론 모델은 어떤 의미에서 기계론과 생기론에 대한 중간 연결적인 시도라고도 볼 수 있는데, 20세기 초 로이드 모건(L. Morgan)의 책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 내용이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도브잔스키(Dobzhansky) 역시 말하길,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은 진화과정에서 발생 및 초월로 서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생명은 생명이 없는 것에서 창발하고, 정신은 정신이 없는 것에서 창발한다고 말한다. 진화의 과정에는 생명의 발생과 정신의 발생이 끼어든다.



하지만 이러한 <창발>emergence이라는 속성은 결국은 A에서 B가 나온다는 식의 얘기에 불과하다. 즉, 생명과 정신 등의 특질이 이러한 특질을 결여하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설명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도브잔스키 역시 단지 신비스럽게 남아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 <창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일찍이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하버드 대학 강의>에서 <창발>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구리를 황산에 떨어뜨리면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하지만 색깔이 변한다. 창발적 진화 이론은 그렇게 새로운 속성이 단순히 창발한다고만 말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그것들이 창발했다는 것인가? 만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들이 창발했다면 창발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우리의 무식함을 은폐하고 있을 뿐이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마치 설명하는 것처럼 현상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창발의 출발점에는 반드시 사전에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Whitehead's Harvard Lectures 인용)


오늘날 전체 과학 진영에서 창발을 설명하고자 하는 진영은 아직 주류는 아니긴 해도 복잡계를 다루는 비선형 동역학 진영에서는 매우 활발하다. 대체로 <창발>은 과학자들에게는 알게모르게 기피대상이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2004년도까지만 해도 emergence(창발, 출현)이라는 용어 자체가 <물리학 사전>에 실리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4. 생태학적 모델(=홀아키적 모델)로 보는 생명 이해


생기론적 모델과 창발적 진화론 모델은 앞서 말한 기계론적 모델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고자 한 시도였지만, 설명이 관여되는 한 생기론 모델과 창발 진화론 모델은 여전히 설명 못하는 그 지점에 대해서만큼은 이를 다시 또 기계론 진영에 떠넘기게 되는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 한계를 가진다.



그런데 정작 생명을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모델에서는, 예컨대 동물을 기계로 보는 관점의 경우 그 해당 유기체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해당 동물과 환경을 분리시켜 해당 동물에 대해서만 연구하며 그러한 동물의 활동은 해당 동물의 내적 구성 성분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매우 지배적이었다.



이에 비해 생태학적 모델에서는 유기체를 환경과 상호 연관된 것으로 묘사한다. 반면에 기계론자들은 복잡한 기계 혹은 세포 내부 메커니즘의 산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기계론적 모델에서는 세포의 구성 요소들이 기계의 구성 요소들처럼 행동한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이러한 작용에 있어서는 유기체는 환경과 무관하게 오로지 기계론적 법칙에 복종되고 있는 것이다.



생태학적인 대안 모델은 세포의 구성요소들도 서로에게 연관되고 또한 전체로서의 세포와도 연관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생명의 홀아키적 진화는 물리학자인 에릭 얀치가 말한 <거시적 진화>macro-evolution와 <미시적 진화>micro-evolution가 함께 상호 공명되는 차원의 <공진화>co-evolution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모델로서의 생명 이해는 생명의 구성요소들은 개체만이 아닌 개체와 환경을 전체적인 유기적 시스템 상에서 상호 연관된 관계들의 결합체로서 존재한다고 보는 생명 이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것은 아원자, 분자, 세포, 집단으로 진화할 때마다 모든 것들이 개체 요소들과 함께 통째로 진화하는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화하는 생명은 바로 홀론적이면서도 통전적인 지평의 밑그림을 함께 모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물리학 진영이 뉴턴물리학에서 현대 물리학으로 새롭게 대체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생물학에서도 기계론적 모델이 아닌 생태학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공급
- 실체적 관점에서 사건적 관점으로의 이해 전환이 필요


생명을 기계론적 모델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광범위한 사고습관 및 지각 양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실상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사상은 개체 본질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실재들의 운동에 관한 이해로 드러났었다.



시대에 속해 있는 과학자들은 흔히 과학 이론은 시대적인 형이상학적 패러다임과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부지불식간에 과학자들의 뇌리 속에 자리해왔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동서양의 세계관이나 인간 이해나 그토록 달랐던 데에도 저마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서구 과학자들에게는 앞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론적 사유의 영향이 지대했으며, 이후에도 데모크리토스와 데카르트 등등.. 예컨대, 바퀴의 운동이 바퀴 자체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보는 이해가 당연한 상식적 전제로서 작동되어 왔던 것이다.

다만 근대 철학자인 헤겔의 경우는 실재를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했음에도 그가 얘기한 것은 인간의 현실에 제한적이었을 뿐이다. 칸트를 비롯한 독일 관념론자들은 과학의 세계를 뉴턴 고전 물리과학의 범주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현대과학에 속하는 장(場)이론이나 양자역학은 실체적 사고가 아닌 사건적 사고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식 습관은 사건을 생각할 때조차도 여전히 실체론적인 사고 습관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계론적 모델에서 생태학적 모델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실체적 사고에서 사건적 사고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학적 모델은 실체론적 편견에 불가피하게 들어 있는 환원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생태학적 모델은 비유기체와 유기체, 비생명체와 생명체 사이의 이원론을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다.



또한 돌과 같은 사례에선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계론적 모델로도 논의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일한 원자라도 그 배열과 조직화에 따라 전혀 다른 질적 변화를 낳는 사례들이 자연과학에서조차 발견되고 있기에 생태학적 모델의 타당성을 우리는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회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생명체 역시 생태학적 모델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인간 생명체를 생태학적 모델로서 이해할 경우, 자연과 문화는 근본적으로 이분화 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미 인간이라는 생명체 안에 138억 년의 우주 진화의 과정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세계는 인간의 문화를 터놓는 조건화를 이루며 그 둘 사의 확연한 경계란 모호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를 전인적으로 그리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려는 공부는 그야말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도록 해주는 가장 바람직한 공부 방법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흔히 나누는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임의의 구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몸삶의 경험은 언제나 총체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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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규 2013.08.18 18:56
    20세기 본격 기계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분자생물학이 태동했고 생기론적 이해는 더이상 하나의 모델로 가치가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현재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창발적 모델이며 인식과 사고를 구성하는 데에는 환경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모델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저는 1 10% 2 0% 3 50% 4 40%로 구성된 복합적 모델로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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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규 2013.08.18 18:56
    ㅋㅋ 4번을 당연히 주장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저는 3번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3번만으로 완벽한 설명은 불가능하단 말이죠. 그래서 복합적인 complex 모델이라고 얘기했어요. 굳이 일관성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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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두 2013.08.18 18:56
    물과 기름도 다른 재료와 함께 믹서에 넣고, 고속 회전시키면 마요네즈가 됩니다. ^ ^
    (요령; 요리하다 남은 재료를 잘게 잘라서 믹서에 넣고, 계란(채식인은 두부나 삶은 콩을 넣을 듯), 황설탕도 넣고 식용유를 조금씩 부으면서 가운데가 손가락 굵기만큼 뿅 뚫릴 때까지 농도를 맞추며 돌립니다. ^ ^)
    많은 재료가 섞였는데, 어느 하나의 재료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성질이 출현했을 때, 창발이라고 할 것입니다.

    화이트헤드가 녹색글에서, 예로 든 구리와 황산의 반응처럼, 두 가지 재료의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창발'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화이트헤드 시대만 해도 창발의 정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생명이라는 현상은 매우 복잡한 현상이기 때문에,

    위의 4가지 재료와 더 많은 재료가 섞인 '마요네즈'라는데 한 표 던집니다.

    기계론에서 창발론으로, 생기론에서 생태학적 모델로 발전한 것인 듯이 보입니다.

    창발론과 생태학적 모델은 동전의 양면 같이 보이구요.


    결국 현대적인 진화론이 두 모델을 하나 모델로 진보시켜 설명해야 할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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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두 2013.08.18 18:56
    마요네즈는 기름과 물 얘기를 보는 순간에 만든 '농' 맞습니다.
    마요네즈 얘기가 가벼운 조크지만, 구리 황산과는 다른 것을 보여 주는 점은 있을 것입니다.

    새로움의 출현이라고 모두 창발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움의 출현'과 '창발'은 무엇이 다를까요.
    여기에 얘기의 촛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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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두 2013.08.18 18:56
    생명의 논의에서

    캄브리아기 수많은 종이 갑자기 나타났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살기위해 각자의 선택으로 어떤 생명의 패턴으로 변모하며, 살아남은 것들은 살아남고, 멸종된 것들은 멸종되었을 것입니다.

    자기조직화라는 규칙을 이루고 하나의 패턴으로 연속성을 갖게 되었을 때, 창발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구리-황산'처럼 한번 나타나는 현상을 창발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냥 자연속의 하나의 현상으로 일반화 속에 묻힐 때.....

    '마요네즈'는 사람들이 선호해서 오뚜기마요네즈라는 이름을 붙여서 유통을 하고,
    집에서도 자주 만들어 먹는 음식문화로 정착할 때,
    마요네즈의 발명은 '창발'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앞에서는 부분으로 설명이 안되는 새로움의 출현을 창발이라고 했던 것 같고, 하나더 추가하자면,
    창조적 발생---창발
    (모든 발명특허의 등록이 발명(發明)이라고 하기 보다는,
    새로운 문화의 패턴으로 정착하는 것을 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뒷부분은 생태적 모델과 통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생태적 모델이 보는 환경과의 관계성이 이루어져서 생기론이 생각한 '생명성'을 갖출 때 비로소,
    창발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앞에서 창발성과 생태적모델은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본다고 했습니다.
    창발성의 이면에 생태적 모델이 있고, 생태적 모델의 내면에 창발성이 포함되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창발성이 생태적 모델을 갖추지 못하면, 기계론으로 수축하고, 생태적 모델이 창발성을 포함하지 못하면, 인문학에 머물러 생기론으로 수축할 것입니다.

    이렇게 창발성과 생태적 모델을 연결해서 보는 것이 '진화론'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 ?
    이기두 2013.08.18 18:56
    그렇게 볼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 ?
    이기두 2013.08.18 18:56
    "자기조직화라는 것도 이전에 없던 새로움의 발현 지점을
    그저 다른 이름으로 표명한 것이기도 하답니다."

    이 부분은 좀 이상한 듯 합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발현"이 일어나는 지점에는 아직 '자기'라는 것이 아직은 없는 때입니다.
    '자기조직화'는 독특한 생명의 현상이고, 무생물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쓰더라도, 최소한 네트워크 작용으로 일어나는 생명현상과 유사한 현상에 대해서 자기조직화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봅니다.

    즉 어떤 발생(새로움)이 네트워크적으로 스스로 어떤 반응을 선택하고, 그것이 연속적으로 자기동일성을 이어갈 때, 비로소 자기조직화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발생에 창발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조직화라는 발생 이 후의 반응 또는 현상이 이어가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
    이기두 2013.08.18 18:56
    새로운 꺼리는 아니고, 처음부터 좁혀지지않는 거리였습니다.
    토론의 한계네요. 정말 여기까지만입니다.
  • ?
    이기두 2013.08.18 18:56
    토론 자체라면,
    토론할 때, 토론의 주제에 집중해 주기 권합니다.
    주변적인 용어해설이나, 수 백 페이지 책을 인용하며, 시선을 밖으로 돌리려고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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