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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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상학과 과학 그리고 편향




“철학에 있어서도 주요 위험이 되는 것은 증거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의 협소성이다. 이러한 협소성은 특정한 저자의, 특정의 사회 집단의, 특정의 사상 학파의, 문명사에 있어서의 특정 시대의 개성이나 소심함에서 생겨난다. 준거로 삼는 증거는 개개인의 기질, 집단의 편협성, 사유 구도의 한계에 의해 제멋대로 편향된다. - 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p.579.


“우리는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을 통해서 분석하는 것은 우주의 여러 면모들 중에서 선택된 극소한 부분일 뿐이다.” - Modes of Thought. p.89.


 


가장 심층적인 무의식적 편향에 속하는 <형이상학적 편향>



인간 경험 속에는 크게 <측정의 느낌>과 <측정 불능의 느낌>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언제나 함께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항상 얽혀 있는 채로 매순간마다 총체적으로 경험되어진다. 인간은 매순간 우주 전체를 경험하지만 우리의 명료한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은 몇 가지 밖에 되지 않는다.



이때 측정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는 두 가지 범주로는 <극대적 차원>과 <극미적 차원>이 있다. 우리는 극대적으로는 우리의 우주시대를 넘어서까지 알 수도 없으며, 또한 극미적으로는 소립자 물리학의 이론적 수준 이상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쿼크의 발견도 직접적인 관찰은 아니지만 현재 가설에서 이론으로는 승격되어 있다. 우리의 우주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에 대한 규명도 여전히 소원하다.



그렇기에 인류 경험의 측정능력과 측정기술의 발달로 나중에 더 중요한 새로운 발견이 있게 될 여지는 항상 남아 있을 것이다. 초끈 이론도 아직은 가설일 뿐 실험적으로 예증된 것도 아니다. 만일 가깝고도 먼 훗날에 새롭게 측정 범주 안으로 포섭되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있게 되면, 기존의 이론들까지 또다시 재편될 여지 역시 항상 남아 있다고 봐야한다.



그럼에도 현재에 있어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경험 자체는 (주로 개념적으로 자각되어지는) 측정 범주로 포섭된 요소들과 아직 여전히 개념화되어 있지 않은 미지의 측정 불가능의 요소들이 함께 뒤섞인 채로 총체적으로 경험되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몇 가지 밖에 안 된다.



인간의 언어는 특히나 이를 제약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다. 어쨌든 우리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측정 불가능의 요소들이 터놓고 있는 <맥락적 의존>을 피할 수 없다. 나도 모르는 다양한 맥락적 의존들은 나의 정체성에도 관여하고 있을 정도다. 우리가 어떤 생활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문화적 환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내가 느끼는 경험의 느낌은 서로 다른 편향을 지니기도 할 정도다.



형이상학은 측정 불가능의 요소들을 미리 시연적으로 상상적으로 개념화하는 작업에 속한다. 붓다는 세상 전체를 경험해본 것은 아님에도 연기론을 주창할 수 있었고, 마르크스 역시 세상을 전부 경험해보질 않았지만 세상은 물질적 토대가 먼저 중요하다고 봤던 유물론적 형이상학에 기초한 사유를 폈던 것이다.



철학적 사유가 선명하게 잡혀 있지 않을 경우, 우리는 종종 측정 불가능의 경험 요소들을 모호하게 방치하는데, 그럴 경우는 거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놓여 있는 가정적 생활적 환경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전의 <동과 서> 다큐에서도 봤듯이 동서양의 형이상학이 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의식적 편향을 낳는지에 대한 사례는 많다( https://100books.kr/?no=18613 참조). 인지적 편향에 있어서도 인간 몸삶의 사유에 궁극적 기초를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편향은 가장 근원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어떤 형이상학을 선택할 것인가는 피할 수 없다. 물론 의식적으로는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되어진다는 것과 의식적 생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서로 다른 성격의 것이다. 이미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비의식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있지만, 의식화되는 것들은 극소한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의식화된 것들만 갖고서 “나의 경험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떠들고 있는 것뿐이다.



지난 20세기 철학과 언어학 진영에서도 분명하게 언급된 바 있듯이, 그 어떤 사물 혹은 존재의 의미는 결국 그것이 놓여진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 어떤 사물 혹은 사람에 대한 정체성은 그 사람이 놓여지는 존재 경험의 맥락 속에서 자리매김 되어진다. 인간에게는 항상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맥락적 차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은 맥락 중의 맥락이자, 패러다임 중의 가장 궁극적인 기초로서의 패러다임을 다루는 분야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모든 지평에 스며들어서 영향을 끼친다.



형이상학적 편향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사유 속으로 포섭되는 아젠다를 세팅하는 데 있어 가장 궁극적인 기초 결정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혹은 사유 자체의 기초 뼈대를 형성한다. 쉽게 말해, 자신의 기초 철학적 세계관이 달라지면 그 자신의 가치관, 혹은 인생관도 달라지며, 그리고 그것이 달라지면 평소의 삶의 생활방식이나 평소의 사유의 습관조차도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관념론자와 유물론자는 인간과 사건을 보는 이해 방식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인생의 목적까지도 다른 가치의 생활을 추구한다.



우리가 만일 인터넷이나 서점에서 정보를 구한다고 했을 때, ‘어떤 정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이를 접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아마도 다양한 정보들 중에서도 당연히 평소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흥미 있게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은 채로 그 관심 정보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킬 것이다.



형이상학적 편향은 정보의 내용 자체에 관여하기보다
내 삶에 있어 어떤 정보를 더 우선적인 중요한 정보로서 취급할 것인가 하는
그 기초 심급에서부터 작동되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다.



편향 극복에 대한 최선의 방법은?



그렇다면 이 같은 형이상학적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물론 '진리에 이르는 왕도란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알려진 최선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바로 철학적 사유를 포함한 인문적 사유와 그리고 과학적 성과의 사유들을 결합시키면서 이 세계를 끊임없이 이해하며 경험해보고자 하는 몸삶 훈련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천적 지평과는 항상 대차대조의 비교 관련 속에 놓여 있어야만 할 것이다. 동양에선 이를 <공부>Kung-Fu라고도 말한다.


인간의 경험 요소들 중에는 과학으로 해명되어지는 것들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과학을 넘어선 차원도 우리의 경험 속에 언제나 남아 있다. 신비를 신비로만 남겨둔다거나 불가지의 영역을 불가지로만 계속 남겨두는 것도 내가 볼 때 인간 지성의 직무 유기에 속한다고 본다. 물론 모름의 영역을 모른다고 표현하는 것을 두고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내가 문제로 삼는 지점은 모름의 영역을 항상 모름의 영역으로만 남겨두려고 하는 바로 그 체념적 성향을 두고서 말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지성사는 언제나 모름의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에 따른 부분적 성취의 개과들도 함께 보여주고 있잖은가!



따라서 사유의 한계를 체념적으로 고정시켜
미리 재단해놓는 것은 그야말로 미래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사유는 끊임없이 실험되어야 하고 모험을 겪어야만 한다.



그 과정에 있어 널리 알려진 최선의 사유 방식의 하나로는
내가 현재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다양한 사유의 실험들을 개진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더욱 깨어지지 않은 것들을 터득해나가는 것이다.



물론 진리 자체에 대한 회의나 진리의 가능성 자체까지 부인하거나 봉쇄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만일 진리 자체에 대한 회의나 그 가능성까지 부인한다면, 과학적 탐구의 동기마저도 근본적으로 봉쇄될 뿐이다. 나와 타자에 대한 소통의 가능성 자체도 차단된다. 그럴 경우 사실상 모든 학문적 탐구들과 사색들은 그저 자기밥그릇과 자족적 유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진 못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진리가 현재의 나에게는 없더라도 그 어딘가에는 있을 수 있다는 신념 자체는 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열어놓고서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은 진보의 종말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MT 16). “오류는 보다 고등한 유기체의 징표이며, 상승적 진화를 촉진시키는 교사다."(PR 320). "오류는 우리가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대가인 것이다.”(PR 350).  

요컨대,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다.

1) '진리는 여전히 변함없는 진리'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이 현재 믿는 바(그것이 무엇이든)를 언제나 다양한 차원의 새로움과 견주어보며 시험할 것!
 


2) 그럼으로써 더욱 깨어지지 않는, 모든 비판에 점점 단련된 결정체를 부단히 추구하는 것을 멈추지 말 것!



3) 행여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오류>가 드러날 경우, 이를 오히려 감사히 여기고 성장의 계기로 삼으면서 더욱 정진할 것!



4) 입장과 입장들과의 충돌은 재난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일 수 있음을 항상 잊지 않기를 빌며..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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