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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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물리학자인?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만유인력은 질량 때문에 생기는 거여??? -응.
근데 질량이 뭐지??? -글쎄...?
전기력은 전하 때문에 생기는 거고??? -응.
전하는 또 뭐래?? ?-글쎄...

참, 양전자하고 음전자하고 만나면 쌍소멸을 일으켜서 빛이 된다며? ? -응.
그런데 계산해 논 걸 보니 전자의 질량만 빛으로 바뀌더구먼,?전하는 어떻게 된거여??? -글쎄...
+/- 전하는 그냥 그렇게 적당히 더하기 빼기해서?허깨비처럼 슬그머니 없어져도 되는거고??? -글쎄...?

그렇담,?'전하'라는 말?대신에 '허깨비'라고 바꿔 써도?상관없겠네?
... <전하>에는 <양전하>와 <음전하>가 있고 <전하>가 움직이면 <자기장>이 생긴다...
... <허깨비>에는 <양허깨비>와 <음허깨비>가 있고 <허깨비>가 움직이면 <심령현상>이 생긴다??

참, 빛도 질량이 있다며??? -응, 움직일 때만.
가만히 서있는 빛도 있남??? -글쎄...?
그럼,?지난주에 돋보기는 괜히 샀네??? -왜?
아~ 가만 냅둬두 빛들이 질량과?만유인력땜시 지들끼리 저절루 모여 돋보기가 될텐데...

  • ?
    임석희 2012.03.27 21:10
    ㅠ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싶어요...
  • ?
    엄준호 2012.03.27 21:10
    전 세상은 우리 뇌보다 넓다고 생각합니다.
  • ?
    이기두 2012.03.27 21:10
    .

    현상은 매일매일 우리를 속인다 하여도,

    세상이 시작되기 전이나,

    세상이 사라진 후에도

    변함없는 법칙이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 .. @
  • ?
    한정규 2012.03.27 21:10
    과학이 모든 문제를 다 풀 것이라고 믿는 미신...
  • profile
    주민수 2012.03.27 21:10
    한정규님,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과학은 철학의 종교화를 막아주고
    철학은 과학의 미신화를 지킵니다.
  • ?
    이기두 2012.03.27 21:10
    과학은 종교의 미신화를 막아준다도
    추가해야할 것 같습니다.
    또한 철학은 종교의 미신화를 막아 준다도 추가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가 마루宗자를 쓰는 것은 사회와 학문를 형성하고 움직이는
    근본최상위 영역이라는 뜻이라면,
    하위영역에서 검증된 법칙과 과학의 모순없는 기본법칙에
    위배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일텐데요.

    @ .. @
  • ?
    임석희 2012.03.27 21:10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이름과 권위에 부여하는
    혹은 과학에 기대하는 절대성.. 우리의 기대(신념)이 심하게 큰 것,
    그래서 미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과학에 절대성이나 맹목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
    과학이 미신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우리가 과학에 부여한 것이지, 과학이 부여해 달라고 한 적은 없잖아요?

    여러사실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과학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1인의 생각입니다. ^^
  • ?
    이기두 2012.03.27 21:10
    우리는 괴델의 불완전성정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검증가능한 지식체계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명제는 불변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체계의 최정점에 에미 뇌터의 대칭성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과학을 사랑하는 정신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어떤 태클에도 무너지지 않을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너지보존이나, 질량보존, 운동량보존은 무너지더라도,
    대칭성 원리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 자연이 생기기 전에도 적용되고, 세상이 소멸된 후에도 변함없이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것을 만나거든 대칭성에 물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매일 매일 현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세상이 생기기 전이나,
    세상이 사라진 후에도,
    변하지 않을 법칙이 우리를 안심하게 합니다"
    의 내용입니다.


    @ .. @
  • profile
    주민수 2012.03.27 21:10
    임석희님, 과학은 인간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탐험하고 그 결과로 모형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과학이라는 이름을 갖습니다. 모형이란 가설의 집합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질량이나 전하 또한 가설의 일부로 볼수 있겠고요. 이렇게 과학의 바탕에는 가설이 깔립니다. 물론 가설은 미신과는 다르지요. 하지만 늘 그렇듯이 맹신이 미신화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과학 또한 임석희님이 지적하셨듯이 맹목적 권위가 부여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미신을 밀어낸 과학이 스스로 또 하나의 미신으로 자리 잡는 식으로...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일조하기도 하고요. 결국 이런 류의 문제는 과학철학이 풀어주리라 기대해 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역사를 보면 "진리가 승자"였던 경우보다는 "승자가 진리"였던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과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진리의 주관적인 면도 문제이겠지만 사회적 권위가 더 큰 역할을 했으리라 봅니다. 다행히 진리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결코 포기된 적이 없습니다. 옆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있었어도 뒤로 돌아가는 경우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자기반성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갈등과 관련해서 과학자들은 소칼의 <지적 사기>라는 책을 읽고는 재미있어 합니다. 저는 거꾸로 과학하는 분들에게 콜린스의 <골렘>도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카를 포퍼와 토마스 쿤의 과학철학 논쟁을 직접적인 예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테니까요. 과학은 차겁고 객관적인 학문으로 보여도 생각보다 여린(?) 학문이란걸 깨닫게 됩니다. 권위가 과학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역사적 실례를 통해...

    무지개가 예쁘다고 잡아 보려고 아무리 산을 넘고 또 넘어도 종국엔 피곤함과 실망만을 안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과학을 제대로 배운다면 무지개는 언제나 그렇게 산너머에만 떠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그래서 헛수고(?) 없이 좀더 현명하게 무지개를 즐기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린왕자'라면 다르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과학은 가히 사랑할만 합니다. 단, 불가(佛家)의 조언 한 마디: "지혜없는 사랑은 서로를 해친다."
  • ?
    이기두 2012.03.27 21:10
    네이버 사전을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옵니다.

    미신6 (迷信)[미ː신]
    1.비과학적이고 종교적으로 망령되다고 판단되... 2.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믿는 것)

    과학
    [명사]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넓은 뜻으로는 학(學)을 이르고, 좁은 뜻으...

    과학주의 (科學主義)
    [명사] <철학> 자연 과학적 지식이 유일한 참된 지식이며, 과학적 방법만이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

    과학만능주의 (科學萬能主義)[명사] 과학에 의해서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

    바로 위의 주민수 님의 댓글로 보면,
    임석희님의 지적과 같이, 주민수님의 말씀의 뜻은 과학이나 과학주의가 미신이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과학만능주의를 미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도 말씀하신 것처럼 과학만능주의는 폐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만능주의와 미신이 같은 것일까"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과학적ㆍ합리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믿는 것)= 미신
    과학에 의해서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과학맹신)=과학만능주의

    이 두가지 믿음에는 어리석음이 개입되어 있다(지혜없음)은 공통적입니다.
    그런데 이 두 어리석음에는 그 바탕이 합리적인 추구인가,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가 하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과학만능주의( 합리적인 추구에 대한 맹신)는 비록 오류조차도 참으로 믿는 어리석음을 내포할 수 있지만, 세월의 시련을 격고나서 참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신(합리적인 추구하지 않음)은 세월의 시련이 있은 후에 오는 깨달음은 오류의 수정이 아니고, 미신(불합리한 믿음)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미신은 법칙이 상위법칙과 하위법칙으로 시스템적으로 연결관계가 없는 것이 특징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신학자 중에는 "불합리하므로 믿는다"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시스템적 방법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시스템적 방법을 추구하는 중에 과정적으로 발생하는 오류.
    이것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은 시스템적인 방법이 있는가,
    시스템적인 방법을 추구하는데, 만든 결과물에 오류인가를 판별하는 것일 것입니다.
    방법이 그르면 방법을 버려야하고, 결과물이 그르면 결과물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요즘의 학문체계는 과학만능주의처럼 가는 것 같습니다.
    거의 대부부의 학문이 과학이라는 용어가 쓰여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철학도 과학철학이 주도 되고, 사회학분야도 사회과학이라고 명패로 바꿔달고 있으니까요.
    한의학은 인문과학이라고 말하는 웃기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 ^
    이러한 사조는 '사실의 판단은 과학적'으로, '당위(가치)의 생산은 각각의 학문영역의 고유의 법칙으로'라는 형태로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생각을 좀더 명백히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물리학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물리학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대칭성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우주가 처음 생겨날 때, 즉 빅뱅 또는 인프레이션의 초기에는 물리적인 작용만 있었을 것입니다.
    전자기 작용은 그후에 생겼고, 전자기 작용이 있은 후에야 다른 과학의 영역이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그 초기에 작동한 물리법칙은 수학과 물리학을 연결하는 대칭성만이 작동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칭성이 우주의 처음 시작을 작동시켰다는 것은 물리학이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초기에 대칭성 깨짐으로 부터 쌍소멸하지 않고, 우리 물질 우주가 있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현상(존재와 작용)이 구분불가능한 프랑크 타임에는 에너지보존이니, 작용반작용이니, 엔트로피 법칙이니,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주초기에 대칭성원리만이 존재하던 순간이 있다면, 지금현재의 현상의 밑바닥에 갈라져서 세부 디렉토리를 달리하는 모든 학문영역의 바탕에 대칭성이 공유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대칭성원리가 우주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라면,
    이것을 믿는 것이 과학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고,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이 과학만능주의인가 아닌가는 이 글을 읽으신 회원님들이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 .. @
  • profile
    주민수 2012.03.27 21:10
    근자에 '과학'이라는 용어가 여과없이 사용되거나 심지어는 무소불위의 대명사처럼 남용되는 느낌마저 있어 편치 않은 상황이지 싶습니다. 흔히 과학은 객관성을 근거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객관성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막상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단지 외부에 존재한다는 속성만으로 객관성을 판단하기에는 충분치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외부의 속성이라 해도 인간의 지각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실재성의 문제를 낳게 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관성이 스며들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성'이라는 용어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정의가 필요하다는 생각 끝에 저 나름대로 이 용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 보았습니다.

    "객관성이란 공통 기준을 의미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으리라 봅니다만 과학과 관련해서 제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이 정도의 정의만으로도 큰 불편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분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수 있어 보입니다.

    첫째가 세상은 조물주의 '설계도'에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설계도'를 찾을 수 있다는 시각,
    둘째는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없고 다만 '지도'만을 그릴 수 있다는 시각 입니다.

    저는 첫번째 시각을 카를 포퍼의 관점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두번째 시각을 토마스 쿤의 관점과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첫번째 관점은 절대자 또는 절대적 진리를 상정함으로 해서 절대성이 곧 객관성으로 이어지게 되므로 생각을 전개하기가 편합니다. 그러나 절대적 존재의 증명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두번째 관점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제 나름대로 객관성의 정의를 내리는 과정에서, '설계도 관점'과 '지도 관점' 외에, '레시피 관점'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객관성으로부터 상대적인 성격이 엿보였기 때문인데 그래서 가끔 절대적 객관성과 상대적 객관성을 나누어 비교해 보곤 합니다. 약간 애매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상대적 객관성이라는 개념은 제게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중의 하나로 보입니다.
  • ?
    이기두 2012.03.27 21:10
    과학을 객관성을 근거로 하는 관점을 중심으로 객관성을 자세히 풀어 주셨습니다.
    설계도 관점과 지도 관점과 레시피 관점으로 보는 객관성에 관점을 소개해 주시고,
    절대적 객관성과 상대적 객관성이라는 객관성을 분류해 주셨습니다.

    설계도 관점과 지도 관점은 명확히 이해를 하겠는데, 레시피 관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의 우주론에서 처럼 10^500 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우주가 가능하다는 평행우주론 관점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창조주가 레시피를 많이 만들어서 어디엔가 준비해 놓았는데, 역사적 시점의 상황에 따라 어떤 상황이 선택된다는 이론인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식 다방에 디스크를 자동 선택하는 기능이 있는 레코드 선별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설계도 관점과 별로 구별이 안됩니다.
    지도 관점은 일견 우리가 보고있는 과학이 디렉토리를 구성하며, 갈라져서 학문의 체계를 구성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설계도 관점은 우주론 중에서 시물레이션 우주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우주가 시뮬레이터에 의해서 시뮤레이션되는 우주일 수도 있다는 우주론인데,
    제가 생각할 때, 이런 우주가 있다면 비경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우주는 에너지 제로에서 에너지 또는 정보의 투입없이 자발적으로 구성되고,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단지 대칭성원리 뿐이지요.
    대칭성원리가 있으면 자연은 최소작용의 원리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우주를 구성하고, 운행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시뮤레이터가 시뮤레이션하기 위해서는 시뮤레이션을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고, 정보처리를 위한 에너지 부하가 필요할 것입니다.
    아마 이 우주보다 더 큰 시스템이 필요하고, 시뮤레이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오류가 날 때마다 엄청난 노동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원망에 시달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구표면에서 대기가 대기권 밖으로 0.5일이나 2~3일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정도는 이 큰 우주에서 매우 사소하고, 오류라고 할 수 없는 정도의 오류입니다만, 그런 오류를 저질렀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으로 부터 원망을 듣겠습니까?

    이런 경제성없는 우주는 굳이 있을 수도 있다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내 코에 스친 향기가 방금 남프랑스의 어느 포도밭에서 방금 떠난 포도향기였다고 말하는 것 만큼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객관성과 상대적 객관성은 인간의 인식작용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가르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짐작으로 과학철학에서 보는 관점인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이제 과학을 공부하는 입장이고, 과학철학을 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저는 가치명제를 다루는 종교, 법학, 경제학, 인문학, 등과 구별하여, 과학은 사실명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객관적 사실이냐 주관적 사실이냐를 구분하는 것이 물리학에서는 약간 애매한 것 같습니다.
    불확정성 원리와 관련해서, "산에 나무쓰러지는 소리가 사람이 듣지않아도 스 소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슈레딩거의 고양이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직관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물리적 사실로는 고양이는 사람이 보기 전까지 생사의 중첩상태라고 하니까, 객관성과 주관성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애매합니다.

    이렇게 인문학 쪽으로 가면, 끝없이 생각의 밀림 속에 헤메게 됩니다.
    물리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투망줄을 잡고, 어망을 던지는 것처럼
    복잡한 이세상을 단순하게 볼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아니라고, 양곱창같이 복잡한 미로를 헤멜 것이라면 (약간 억지인 줄은 알지만, ^ 6 ^)
    왜 물리학을 하겠습니까?


    @ .. @
  • profile
    주민수 2012.03.27 21:10
    종교와 철학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오래전에 인천백북스에 달았던 제 댓글입니다.

    芭蕉葉上無愁雨??? 파초잎에 떨어지는 비는 시름이 없건만
    只是聽時人斷腸??? 다만 이를 듣는 이가 애간장을 끊누나.

    파초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동물이 과연 상상이 됩니까? 그런데 위의 선시에서처럼 그저 시름없이 내리는 비일진대, 무엇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파초잎의 빗소리에 애간장이 끊어지게 하는 것일까요?

    종교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생각해 보았고 과연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Beautiful Mind"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John Nash가 본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아무도 못 보는 것을 보게 했을까요? 그리고는 팔꿈치로 건드리는 바람에 펜이 책상에서 마루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소리는 어디에서 났을까요? 펜에서? 마루에서? 아니면 마음에서?

    趙州선사가 개에게 佛性이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던 이른바 '無字 화두'를 생각해 봅니다. 趙州선사가 헷갈렸을리는 없었겠고 또한 말장난은 더더욱 아니었을 겝니다. 여기서 역사라는 기록은 단지 정지화면을 보여줄 뿐이고 역사에 대한 해석은 모름지기 사건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趙州선사의 선문답이 일어났던 상황을 뒤집어 생각해 봅니다. 즉, 개에게 佛性이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대답하는 趙州선사에게 문제가 있었던게 아니라 오히려 질문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누군가, 설마 개에게도 佛性이 있겠는가 싶어 묻는다면 업신여기지 말라는 뜻에서 당연히 답은 "개에게도 佛性이 있다!"가 될 것이고... 또 누군가, 만일 개에게도 佛性이 있다면 개의 佛性을 기어코 찾아보겠노라 해서 묻는 것이라면 괜히 헛 힘 빼지 말라는 뜻에서 아마도 답은 "개에게는 佛性이 없다!"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연히 쓸데없는 '남'의 佛性엘랑 집착하지 말고 부디 자신들의 佛性에나 신경쓰라는 노선사의 친절함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지는 화두라면 지나친 생각일까요?

    종교와 철학은 둘 다 가치의 문제를 다루는 이복형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절대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철학은 실재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치란 무엇일까요? 가치란 선호를 바탕으로 하므로 속성상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절대적 가치란 결국 실재성이 결여된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이번엔 실재의 의미가 발목을 잡는군요.
  • ?
    이기두 2012.03.27 21:10
    토론을 길을 제대로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종교와 철학을 주제로 삼는다면, 화두와 선시를 제재로 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두의 생명은 해석하지 않는 것을 제일 원칙으로 합니다.
    화두를 해석하면 생각이 번지고, 참선을 하는 목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가는 것입니다.
    참선은 생각이 번지는 것을 차단하고, 뇌안에서, 몸안에서 시스템이 작동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인천토요일 상대성공부모임에서 잠간 얘기를 했었는데, 불교의 공부 목적은 지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데 있다기 보다, 뇌안에서 몸안에서 시스템을 바꾸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위에 인용하신 선시에서 보는것처럼,

    파초잎 위로 무심한 비 소리,
    그 순간을 듣는 자, 창자를 끊기리.

    비는 무심한데, 듣는이는 어찌하여 창자가 두 동강이 되는가.
    해석붙일 것은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단절되는 순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섬뜻하리 만큼 완전히 생각이 단절의 순간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무"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유"

    두 대답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생각이 두절되는 순간만을 본다면,
    이 순간을 블랙홀삼아 닭이 계란 품듯이 가슴에 품을 뿐입니다.
    이 블랙홀을 놓으면, 지구가 블랙홀에 몽땅 빨려들어가고,
    들고 있자니, 내몸이 몽땅 끌려들어갈 것 같은 위태로운 순간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시공이 단절되고, 일체의 언어와 의미가 단절된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대칭"을 봅니다.
    완벽한 구대칭을 본다면 그것뿐입니다.
    (사실 구대칭이라고 해도, 근사적인 비유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것은 실제 그 정통한 방법으로 직접 해 보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비한 것도 아니고, 스포츠는 그 스포츠를 하는 사람만 알지 짐작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짐작으로 이럴 것이라느니, 저럴 것이라느니 하는 해설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될 뿐입니다.)
    이것뿐입니다.


    @ .. @
  • ?
    이기두 2012.03.27 21:10
    가치에 대하여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절대적가치는 종교적 가치이고, 상대적 가치는 철학으로 부터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상대적 가치는 선호를 바탕으로 하니까 실제성을 결여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유교의 경우는 윤리라고 하는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가치를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일견 주민수님의 말씀이 타당해 보입니다. 철학에서 부터 도출된 가치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종교로 부터 나오는 절대적 가치는 종교권력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명령적인 가치관일 터이니까, 역시 실제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적인 사실로 부터 도출되는 가치도 실제성이 없는 것일까요.
    과거에 동물을 학대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동물은 동물일 뿐이니까." 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이 있고나서는 인간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자연계내에 하나의 생명일 뿐이라는 사상이 싹트고 부터 동물학대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사실을 기반으로 합니다.
    과학적사고가 없던 시절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낮다(남존여비)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정신이 발달하고 부터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과학적 사고가 발달하지 않던 시대에는 신분제가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대를 이어 낮은 신분을 유지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대표적이고, 종교로 부터 가치관을 강요하던 서양의 중세와 유교가 지배하던 나라들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자연법사상이라고 하는 과학적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법 사상이 중심으로 오면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고, 존중받을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가치관이 법적으로 보장 받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알고 있듯이 이것은 종교권력이 만든 일방적인 가치관-신이 권력을 권력자에게 위임했다는 왕권신수설-을 폐기하기위해서 서구인들이 싸워서 쟁취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의 법사상은 동양에서는 그러한 투쟁이 없이 그냥 전달되어서 이러한 법적 자유가 원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원래 있었던 것이 사실 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중기에 이후에 유교적인 나쁜 가치관의 법이 시행되었던 것이지 불교가 일반적이었던 고려와 조선 초기 까지만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 일반적이었고, 남편이 처가 부모의 제사를 지내고, 여성이 자기의 재산을 별도로 관리하는 부부별산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양의 중세에는 오늘 날과 비슷한 인권을 누렸던 것입니다.
    수천년 내려온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무너진 것은 불교가 지배하던 시대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상이 당시의 지배계급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경전 곳곳에 사람들 사이나, 동물과 사람의 사이에도 차별이 없다는 사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말뿐이 아니라 불교의 3 대는 여성이 최고 지도자였고, 중국에 왔던 달마대사의 위 대 지도자는 여성이었습니다. 불교에서 남여평등은 실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교에서 보는 것처럼, 과학사상은 실제적으로 사회를 평화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실제성"이라고 하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치의 실제성은 과학적사상으로 가치를 도출하는가, 인문학적, 종교적인 권력자의 의지에 의해서 강요되는가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신정적 종교권력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의 시도가 약간의 시기적 오차는 있어도 서기 전 5~6 백 년 전에서 부터, 석가모니불과 노자, 공자, 소클라테스, 예수님, 마호메트 등이 같은 시대에 출현하여 비슷한 가치관으로 사회를 계몽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이래 국가가 성립하면서 신화시대가 시작되어 신정 절대권력에 의해서 이끌어 오다가 인지가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여 더 이상 신정정치가 곤란하다는 인식이 사회저변에 넓게 형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이나 인도나 희랍같이 자유로운 사상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 다신교 국가를 중심으로 각양각색의 신흥종교와 철학이 발생하였던 것이지요. 그중에 두각을 나타낸 위에 열거한 분들은 공통점이 세계적인 스케일의 보편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세분은 일생을 제자를 가르치며, 후학을 길러낼 수 있어서 신정정치를 끝냈거나, 상당히 감소 시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두분는 제자를 충분히 가르치는데 필요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불행히 돌아가셨지요.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기간이 3년여 밖에 안되고,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제자의 대가 이어지지 못하고, 예수님 사상의 아카데미를 만들지 못한 유일 경우였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일찍 행방을 감춘 후에 기독교인도 아닌 로마 황제와 귀족들에 의해서 애매하게 시작된 것이 서양의 기독교이고, 유대교 경전이 구약이란 이름으로 예수님 경전 위에 수렴청정처럼 올라앉아 있어서 신정의 종결을 보지 못하였지요. 로마황제가 황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대신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일 것입니다. 왕권신수설이 아니면 공화제로 가야할 것이니까요. 이렇게 된 역사의 비극은 또한 유대교라는 유일신교의 폐쇠성과 유대땅에 예수님 당시에 사상시장이 협소하고 메말라 있었어서 예수님의 새로운 사상을 받아 들일 만한 여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인이 태어나도 토양이 있어야 한다는 ....ㅠ ㅠ

    다시 정리하면, 가치는 과학적 사실로 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 당위입니다. 가치는 '실제성'이 있어야 보편성을 가지게 되고, 인간과 자연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 @
  • profile
    주민수 2012.03.27 21:10
    "자연이 한 권의 '책'과 같다면 도입 부분은 후반부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므로 도입부만 보고도 후반부를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입부에서 배운 방법들을 후반부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책이 아니라 잡지처럼 생겼다면 문제는 다르다. 잡지의 경우 일부분만 보고 다른 부분까지 미루어 짐작하는 일은 바보같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 맥스웰

    "훌륭한 책의 특징은 ... 그 책이 글 쓴 이에게는 '결론'이요, 읽는 이에겐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독자의 지혜가 시작된다." - 프루스트
  • ?
    이기두 2012.03.27 21:10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인용구로 토론을 마무리 해주셔서 좋습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기억을 더듬어 시 한 대목으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같이 방안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벌이 방안에 들어 왔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벌은 햇살이 밝게 비친 한지 문을 열린 문으로 착각하고, 문에다 자꾸 머리를 들이 박고 있었습니다.

    "옛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 본들 언제 밖으로 나가리."

    제자는 잠시 스승을 떠난 있던 사이에 실제 수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었고,
    스승은 실제 수행을 하지않고 경전만 공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자가
    경전의 뜻에는 밝았으나, "실제성"에 밝지 못한 것을
    벌에 비유하여 이 시를 읊음으로서 스승이 깨달음을 얻게 하였습니다.

    종교까지 가져다 이야기했지만, 얘기하려는 것은 과학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하여야 자연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가"에
    우리의 관심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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