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백북스

조회 수 5610 추천 수 0 댓글 2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55차 인천정기모임 | 현대과학철학 논쟁




- 일시 : 2013.09.13. (금) 19:00

- 장소 : 인천불교회관 청소년문화원 2층 강의실

- 발제 : 주민수 회원 ( 물리학 박사 / 고체물리학 전공 )


- 회비 : 없음


- 문의 : 회장 안희찬
010-8712-1429

- 문의 : 총무 김형태
010-9390-7195


- 선정도서 : 현대과학철학 논쟁
 






































이 책은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eds. by Imre Lakatos & Alan Musgra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를 완역한 것으로, 1965년에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 과학철학 세미나를 토대로 그 후 몇 년에 걸쳐 재구성된 산물이다.





















































현대과학철학 논쟁 –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
인천백북스 9월 정기모임 주제는 《쿤/포퍼와 관련된 현대의 과학철학》 으로 주민수 박사님께서 진행을 맡아 주셨습니다. 
  다음은 주민수 박사님의 전언입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의 과학철학을 살펴볼 생각인데 쿤/파이어아벤트/라카토스/포퍼 등의 과학철학적
견해를 비교해 볼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특히 〈과학〉과 〈과학철학〉의 관계를 함께 생각해 볼수 있는 기회
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오시는 길


향후, 인천백북스 정기모임 장소를 아래와 같이, 새로운 곳에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장소 : 인천불교회관 청소년문화원 2층 강의실

주소 :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1동 1125-6
 

대중교통 : 인천지하철 예술회관역 4번출구 로 나오셔서, 왼편으로 구월여자중학교 건물이 보이는 골목으로 오시면 됩니다.
구월여자중학교 방면으로 도보 3분 거리 직진하시면, 좌측으로 청소년문화원 건물이 보입니다.


오시는 길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1125-6번지


인천지하철 '예술회관'역 하차. 4번 출구.


( 1호선 부평역 환승 )


인천불교회관  청소년문화원 2F






  • ?
    강신철 2013.08.11 08:26
    매우 흥미있는 주제군요. 백북스의 많은 회원들이 참석해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참석하려고 합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강신철 교수님의 귀한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무력감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다시금 용기를 얻고, 제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인천백북스 9월 정기모임은 제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인천모임 총무로 지명된 지 만 2년이 되는 모임입니다. 지난 24번의 정기모임과 20회의 토요공부모임을 준비하면서 보람과 즐거움 못지않게 깊은 마음의 상처도 남기게 되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인천모임을 이끌어 주신, 교수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번, 9월 인천정기모임은 주민수 박사님의 인천모임에서의 열 번째 강연이기에 더욱더 뜻깊은 모임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정강길(미선)님 // p.s 답변드립니다. 지난, 7월 토요공부모임 뒤풀이 식사에서 함께 말씀 나눈 바와 같이, 토요공부모임이 더이상 "모임을 위한 모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 후, 7/25 번개모임(운영회의)에서도 향후 인천모임은 매월 둘째 금요일의 정기모임 중심으로 운영할 것을 재확인하였습니다. 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더욱 집중적으로 운영하고자 합니다.
    선정도서와 주제에 대해, 분기별로 <발제-발제-토론> 방식으로 운영할 예정입니다. 인천모임 참여 인원수 변동에 따른 장소 문제와 특별모임(토요모임) 장소에 대한 복안과 계획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Imre Lakatos 가 편집한, 본 선정도서가 과학철학책으로서 아주 좋은 책이며, 한번에 마치려하기 보다는 조금씩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 좋겠다는 회원님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향후, 토요공부모임(토론으로 진행)은 매월 개최에서 분기별 개최로 변경하여 진행하겠습니다.
  • profile
    주민수 2013.08.11 08:26
    가끔 포퍼가 진정한 '철학자'였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빈에서 분석철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렸고
    1940년대에는 런던에서 언어철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렸으며
    1960년대에는 또 런던에서 과학철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렸지만
    번번이 비트겐슈타인의 망령(?)에 휘둘리기라도 하는 듯한 결과로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국외자'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저술은 이런 느낌을 더 부추기는 듯합니다.

    포퍼의 관심사 중 하나는 '과학'과 '사이비과학' 사이의 구획설정 문제였습니다.
    전칭명제에 대한 귀납적 검증은 '모든'이라는 수사학적(?) 표현 때문에 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로 인해 '과학의 검증'은 불가능해 보이는 반면 '사이비과학의 반증'은 한결 쉬워 보입니다.
    이 점을 알아챈 포퍼는 '검증가능성' 대신에 '반증가능성'이라는 방법론의 주장을 폅니다.

    바로 여기에 '포퍼의 역설'이 존재함을 보게 됩니다.
    즉 포퍼에 따르면 진리는 반증가능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반증가능성에 의해 부재가 증명될 뿐입니다.
  • profile
    주민수 2013.08.11 08:26
    포퍼는 과학적 태도를 지향하는 사회학자로서 진리의 통시성(通時性)에 대한 의존성을 보이고
    쿤은 사회학적 태도를 지향하는 과학자로서 진리의 공시성(共時性)에 대한 의존성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회학적 성향을 감안해 볼 때 이 둘 사이의 논쟁은 과학철학보다는 과학정책에 관한 논쟁으로 파악하는 편이 오히려 이해를 돕는 것 같습니다. 즉 이들의 논쟁에 나타나는 '과학 철학'이나 '과학 이론' 또는 '과학 방법'이라는 단어를 '과학 정책'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읽어보게 되면 오히려 의미가 뚜렷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논쟁을 불러 일으킨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저술을 보면서 이 책의 제목으로는 <과학 발전의 비판 (The Critique of Scientific Development)>이 더 잘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만일 이렇게 바꿨더라면 그 간의 불필요한 논쟁을 혹시 줄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저술의 내용 중 특히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매우 혼란스럽다는 비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의 저술에서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심도있게 살펴봄으로써 용어 사용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쿤이 강조하고 싶었던 핵심에는 저술의 제목에 드러난대로 당연히 '과학 혁명'이 일순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는 개념이 그가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요점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정상과학'이라는 번역에 불만(?)이 있습니다.

    왜 '혁명적'이라는 개념에 대비되는 개념을 쿤은 굳이 '정상적(normal)'이라는 개념으로 설정했을까요?
    그 이유를 풀어낼 수 있다면 <과학 혁명의 구조>의 주장들을 큰 오해없이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과학이란 무엇인가 / 과학과 과학철학의 관계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계기와 기회를 주신 주민수 박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민수 박사님의 댓글 속에, 포퍼/쿤 논쟁에 대한 핵심정리가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사에서 결코 직선적이지도 단선적이지도 않은 과학의 개념과 방법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민수 박사님의 쿤/포퍼 읽기에 대한 제안을 염두에 두고서 선정도서를 정독하고자 합니다.

    혁명적 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정상과학 이라는 개념을 설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쿤은 과학교과서/종설논문 전통을 거부하지만, 실재적으로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인식하기 어려움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normal science 를 저는 '표준과학'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역주( p. 19 - 20.)를 읽어보면, 우리말로 "정상과학"으로 번역한 고민이 묻어 납니다.
    쿤이 normal science 를 명명/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normal science 를 <표준 과학>으로 상정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책 말미의 <역자 해제>를 먼저, 반복해서 읽고서야 본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계속 떠오르는 의문은, 과학자/철학자의 구분은 가능한가?, 그들은 누구인가? 입니다.
    엄밀히 말해, 쿤 만이 유일하게 "과학자이자 철학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을 철저히 공부하고서 과학에
    기반하여 철학을 하는 것과, 실제로 과학자공동체에 몸을 담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profile
    주민수 2013.08.11 08:26
    "혁명에 의해 과학이 변화한다면 그런 혁명들 사이에는 과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안정된 활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정상과학이라 규정한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어느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anomaly) 현상들의 빈번한 출현에 의해 위기(crisis)에 부딪침으로써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며, 그 결과는 새로운 정상과학이 된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역자 해설중에서, 김명자 역, 1994, 동아출판사)

    이론을 반박하는 수많은 변칙사례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 이론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기 전에는 폐기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통해 라카토슈는 포퍼의 반증주의와 쿤의 역사주의적 과학관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부정적 발견법과 긍정적 발견법으로 구성된 자신의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을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쿤은 비록 그의 용어법은 다를지라도 라카토슈의 분석 장치가 자신의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현대과학철학 논쟁>에서 평합니다. 한편 파이어아벤트는 '통약불가능성'이란 결국 불통을 의미하는데 어차피 '혁명'을 일으켜 보았자 또다시 '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불통이 될테니 차라리 '무정부주의'로 가는 게 어떠냐고 유혹(?)합니다.

    "과학이란 각 공동체가 자체만의 청중이 되며 심판관이 되는 유일한 활동"이라는 쿤의 표현엔 과학공동체의 체질과 관련해서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과학공동체가 여느 사회 조직과 별다른 점이 없다고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비밀결사(?)를 연상시키는 듯한 폐쇄성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국외자'스러운 여러 체험을 통해 '닫힌 사회'에 대해 공포증(?)마저 느꼈을 포퍼로서는 아마도 소감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즉 진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공동체가 여느 사회 조직과 다를 게 없이 오히려 더 주관적이라는 쿤의 주장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에 불과하다고 포퍼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쿤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학자의 사회 또한 '닫힌 사회'의 일종이라는 자신의 지적이 기껏해야 포퍼의 주장의 연장선일 텐데 도대체 왜 포퍼가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대중 서적과 철학적 저작 그리고 과학 교과서들은 과거 과학혁명들의 안정된 결과를 기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대의 '정상과학' 전통의 기반을 드러내게 되는데, 과학철학은 바로 그 과학 지식의 완결체의 논리 구조를 분석한다고 쿤은 지적합니다. 이러한 지적은 과학철학이 '미래형'이나 '진행형'이 아닌 '완료형'의 사건들과만 상호작용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마치 평론과도 흡사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한편 패러다임과 더불어 변하는 것은 관찰에 대한 과학자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테지만, 해석 작업은 패러다임을 정련시켜 줄 수 있을 뿐 수정하지는 못한다며, 패러다임들은 '정상과학'에 의해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쿤은 주장합니다.

    '혁명적 과학'의 대립어로 '정상과학'을 설정한 쿤은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대립어로는 '비통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을 상정합니다. 그리고는 이들의 비교에 '무-정상과학(non-normal science)'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입니다. 이 네 용어의 개념을 이해하는 일이 쿤의 과학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선결 과제로 보입니다만 아무래도 직역보다는 의역이라야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들에 대한 여러분 자신만의 개인적 번역은 무엇인지요?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저는 포퍼의 "열린 사회"를 보면, '정상 과학(normal science)'이 떠오릅니다.
    쿤의 과학철학이 포퍼에 대한 극복에서 출발하였다는 가정하에,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포퍼, 열린 사회 <-----> normal science

    저는 정상 과학(normal science)의 대립어로 포퍼의 "열린 사회"를 상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통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 자리에 포퍼의 "열린 사회"를 대치해 보았습니다.

    normal science <-----> non-normal science

    저는 (연속/불연속) 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

    저의 개인적인 번역(의역 및 치환)은 다음과 같습니다.

    혁명적 과학 : '혁명적 과학'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정상과학(normal science) : 연속적 과학 / (표준과학)
    무-정상과학(non-normal science) : 불연속적 과학
    비통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 : '열린 사회(open society)' 과학
  • profile
    주민수 2013.08.11 08:26
    과학이 없으면 과학철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철학자는 과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철학이 없어도 과학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는 과학철학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학철학은 그 대상이 과학의 내용이 아니라 과학의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과학철학은 규범적 분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철학에는 정성적 비유라는 방법론이 허용됩니다만
    과학에는 정량적 비교라는 방법론만 허용됩니다.

    다른 것을 다르게 본다면 이는 physics의 문제가 됩니다만
    같은 것을 다르게 본다면 이는 paradigm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패러다임은 상사기관적 해석이 아니라 상동기관적 해석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놓친다면, 과학은 별 탈이 없겠지만, 과학철학은 궤도를 벗어나게 됩니다.
    ---------------------------------------------------
    '혁명'이란 기득권을 갖고 있는 기존의 '정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통'이 들어섬을 뜻합니다.
    즉 '혁명'은 '정통성'의 과격한 전이 문제로 여기에는 '정통성'을 다투는 주체 세력들이 관련됩니다.

    쿤의 경우 특히 과학에 있어서 이렇게 '정통성'이 승인된 주체 세력을 '정상과학'이라 부른다고 봅니다.
    이와 같이 '정통성'이 승인되어 주류를 형성하는 연구라는 뜻에서 저는 '정상과학'을 '주류과학'으로 새깁니다.
  • profile
    주민수 2013.08.11 08:26
    "쿤이 소위 '정상' 과학을 정상적이라고 주장할 때 그가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과학사에 기록된 과학자들 중에서는 쿤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정상' 과학자들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현대과학철학 논쟁> p.97, 조승옥 외 번역, 2002, 아르케)

    이러한 포퍼의 주장은 그가 쿤의 '정상과학'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언명입니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과학혁명에 비해 그들 사이의 긴 기간은 쿤이 말하는 '정상과학'이 지배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정상' 과학자에 속해야 합니다.

    포퍼는 이른바 빈학단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반발로 반증 방식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빈학단은 반증을 단지 조금 더 정교해진 검증 원리로 밖에는 보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검증을 사실 입증으로 그리고 반증을 오류 입증으로 보는 쿤의 견해가 한결 산뜻합니다. 그런데 과학이론은 반드시 반증 가능성을 지녀야 하고 반증을 통해 비로소 진리에 접근한다는 포퍼의 주장은 실로 위험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과학이론은 반증 가능성 즉 오류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진리에 접근하게 되는데 이미 오류 가능성을 지닌 과학이론이 어떻게 진리로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론의 발전과 관련해서 포퍼는 반증을 통한 혁명적 발전 모형을 주장합니다.
    네이글은 <과학의 구조(1961)>에서 포섭을 통한 누적적 발전 모형을 제안합니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패러다임 전이를 통한 혁명적 변화 모형을 주장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지식의 성장에 기반을 둡니다. 즉 발전의 개념은 누적이라는 개념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혁명의 의미는 과거의 부정입니다. 과거의 부정에 의한 변화는 누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혁명적 발전이라는 포퍼의 주장은 혁명이라는 개념에 의해 성장이 부정되므로 발전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자기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포퍼가 쿤으로서는 무척 답답했을 것입니다.

    사족: 과학철학은 빈학단의 논리실증주의에서 정초되어 진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빈학단의 논리실증주의는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철학'에도 '과학'적 사고를 도입하자는 의도였으니, <과학철학 (philosophy of science)>이라는 이름은 사실 거꾸로 <철학과학 (science of philosophy)>이라고 불러야 올바른 명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박제윤 2013.08.11 08:26
    위의 논의들에 대한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1) 우리 공부할 책에 대한 중심 논의 주제를 단지 상대주의와 객관주의로 조명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입니다. 자칫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논의 주제들은 다루지 않고 겉도는 이야기를 하기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2) 쿤의 는 이미 국내 전문가들에 의해서 <정상과학>으로 번역되는 것에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우리는 공부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번역 시도보다는, 이 번역이 왜 좋은지를 찾아보는 것이 더 생산적인 논의가 될 듯싶습니다. 즉, 쿤이 말하는 normal science의 성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3) 우리 교재를 논하면서 과학과 과학철학의 관계를 논할 수 있겠지만, 자꾸 논의 범위를 넓히다 보면, 효과적인 논의에 어려움이 발생할까 염려됩니다. 범위를 좁혀서 심도 있게 파헤치고, 생산적이지 못한 겉으로 도는 피상적 이야기는 가급적 다음으로 미루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한정된 시간도 고려할 필요가 있구요.

    4) 비전공자들이 참여하는 논의가 되는 만큼, 한 번에 끝내기보다 여러 회에 걸쳐서 논의를 나누어 할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미선 (misun)님의 글에,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여쭙습니다.
    말씀하시는, "과학철학(과학관)"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시는지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과학철학은 과학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며, ... 과학철학이 철학의 한 분과에는 속할 수 있어도 철학 자체는 아니다"

    거듭 과학철학과 철학의 엄격한 구분을 강조하시면서 설명하시는 부분이, (제게는) "철학 자체"와 구분되어지는 철학 분과(?)는 <배제> 관계로 읽힙니다. 실제로, 현대철학 체계가 이를 반영하는지 궁금합니다.

    과학철학의 대상이 "과학"임은 자명합니다. "과학철학"이란 대상인 '과학'을, 철학적 분석도구와 관점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철학'에도 '과학'적 사고를 도입하자는 의도에서의 명명으로, <철학과학 (science of philosophy)>이 타당하다는 주민수 박사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미선 (misun)님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제 물음은, 철학과 철학 분과의 관계입니다.

    말씀하신, ""과학철학( =과학관)"은 과학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며, ... 과학철학이 철학의 한 분과에는 속할 수 있어도 철학 자체는 아니다"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철학의 분과에 속할 수 있다"는 더 혼동스럽습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 스스로 생각을 다듬고 곱씹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후에도 참을 수 없는 우문에 사로잡히게 되면, 다시금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에 선정도서에 대한,
    독후감이라기보다 의문점들을 정리한 브리프를 올리고자 합니다. 댓글로서 보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미선 님 고맙습니다.

    인천모임의 주민수 박사님과 박제윤 박사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无恒产 无恒心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출전 <맹자>의 글로, 얼마전 김능환 전 대법관님이 하신 말씀으로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인천백북스 창립을 발의한 창립멤버 한 분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 돈이 있어야 독서모임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가, 돈이 있어야만 사람 대접을 받는가

    '궁색한 위대함'을 지닌 인천백북스
    순수하게 책과 사람이 좋아 모였던 초심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진리를 구하자(眞) 허위를 버리자(善) 희생하자(美)
    -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 profile
    주민수 2013.08.11 08:26
    "과학자에게 있어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개념적 혹은 도구적 수수께끼의 풀이가 주요한 목표이다. 그의 성공적 풀이는 그가 속해 있는 전문가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오직 그 사람들만에 의한 인정을 통해 보상을 받는다. 그의 풀이가 갖는 실제적인 장점은 기껏 부차적인 가치이고, 그 전문가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승인은 부정적 가치이거나 전혀 아무 가치도 없다." (<현대과학철학 논쟁> p.48, 조승옥 외 번역, 2002, 아르케)

    '학습 공동체 백북스'는 위에서 쿤이 말한 '전문가 집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학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닌 '자유의 장'이므로 정해진 목표란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학습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궁금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궁금증에 무슨 특별한 면허가 필요하겠습니까? 만일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이를 정리해서 글로 올리면 됩니다. 이때 누군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러나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다고 자기의 글을 올리면 되겠지요. 글은 말과 달라서 다듬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표정이 없음으로 해서 오해를 증폭시키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객관적인 내용이라 해도 비판은 분위기에 따라 자칫 공격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쿤이라면 객관성이란 단지 집단적 주관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침을 가할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굳이 다른 이들에게 '직접'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본인이 발제를 신청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발제에 있어서는 전문가 급도 있겠고 초심자 급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발제가 승인되고 나면 발제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발제의 형식만이 규정되어야 할 뿐 발제의 내용이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보면 초심자 급의 서투른 발표로 인해 청중이 다소 피곤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는 어차피 학습 공동체가 겪어야 할 성장통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일 발제 전에 게시판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이러한 문제점들을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겠지요.

    각설하고,
    쿤의 '정상과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방점은 앞부분의 '정상'이라는 단어에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뒷부분의 '과학'이라는 단어에 찍혀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 쿤이 '과학'이라고 지칭하는 개념의 규모가 패러다임의 적용 범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쿤의 과학철학을 대하면서 일으키는 혼란은 사실은 알고보면 '그의 정상'이라는 개념을 잘못 정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과학'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위에 인용한 쿤의 주장에서처럼 일단 '과학자 집단'이 정의되고 나면 패러다임과 관련해서 그 '과학자 사회'의 밖에서 왈가왈부하는 행위는 전혀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이란 개념은 '영역-의존성'이 핵심 요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상과학'은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되는 표현일까요? 아니면 물리학처럼 단일 학과에만 적용되는 개념일까요?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주민수 교수님의 함께 삶을 나누는 우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백북스 공간에서 인천모임의 존립에 대해 노심초사 하며 제 의견을 말할 때마다 주변엔 낙관주의자 뿐이고, 진지하게 고민을 나누는 이는 없었습니다.

    발제자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다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인천모임의 운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발제의 내용 뿐 아니라 형식도 발제자에게 모든 사항을 일임하는 방향으로 인천모임의 전통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발제자에 대한 존중과 예우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


    주민수 박사님의 질문은 제가 생각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뜬금없지만, <과학이란 무엇인가>란 오랜 화두를 찾는 공부에서 중요한 방향을 잡은 느낌입니다.

    쿤의 "정상과학" 개념이 자연과학 전체의 적용에도 유효하다면, (제 생각에는) 역설적이게도 쿤에 대한 신뢰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험문제로, 패러다임의 '영역-의존성' 관점에서 '정상과학'은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되는 개념인가, 물리학처럼 단일 학과에만 적용되는 개념인가? 란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좀 더 비판적인 생각으로 책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
    장철순 2013.08.11 08:26
    여러 회원님들의 글로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식한 저로써는 철학과 과학철학은 다음과 같이 이해를 하고 있는데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철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것이고, 과학은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알게 모르게 나름대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각자의 인식적 사고에 의한 것이고 또한 이를 나타내는 것은(표현 하는 것) 언어적으로 나타내게 되므로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지식은 주관적 지식이 되므로 주관적 지식에는 “인식적 정보의 부족(주관적 관점)”이나 “인식적 판단의 오류(착각)” 또는 “의도적 외곡(잘못된 신념)”으로도 인식이 되거나 언어적으로 표현이 되므로 이러한 오류를 될 수 있는 한 피하고자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진실적으로 이해를 하거나 논하고자 “논리(論理)”라는 형식이 필요하게 되어 지식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름대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또한 교류를 하면서 살아가므로 올바른 지식(진실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적 사고에 따른 지식이라는 것에 대부분 개념화된(인식적 정보에 따른 개체적 의미로 인상이라고도 한다) 것의 체계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인식적 정보의 상태로 이루어져 있고, 주관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언어적 논리로 다루는 것에서 객관성(개념화된 진실 또는 정의된 진실)이라는 것을 부여하는데도 한계가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종교적 신과 같은 것이나 마음 의지 정신 등과 같은 것을 보면 각자의 인식적 사고에 따라서 나름대로 개념화된 것으로 지식적으로 가지고는 있지만 이를 객관성을 부여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언어적 개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주관적 해석으로 해석을 하거나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으며, 또한 형이상학적 지식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편성인 관점에서 논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가 있으며, 이 보편성을 가지게 하는 것에서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논하고 증명을 하여 일반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의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논하고 증명을 하여 일반화하는 것으로 보편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 과학적 방법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가 과학이라는 사고를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과거 13세기경에 영국의 철학자(신학자) <베이컨>이 종교적 지식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보다 객관적 사실의 관점에서 수학적 논리와 같이 보다 명료한 방법으로 논하는 것이 참다운 지식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에 따라서 이후에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스넬” “뉴턴” “다윈”등에 의하여 자연에 대한 탐구과정에서 논리실증주의가 정착이 되므로 과학이라는 방법론적 학문이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대철학도 과학적 방법으로 논하게 된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이란 학문적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학문적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지식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대부분 과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과학이라는 것에 대하여 여러 논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저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은 우리의 지식을 보다 진실의 관점에서 논하고자하는 방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은 우리의 지식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탐구를 하거나 논하는 방법론적 진행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결과가 가장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지, 완전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과학은 방법론적인 것이므로 방법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관측사실에 대한 것이 “시공간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관측사실은 실시간적이고 즉시공간적(卽視空間的)으로 이루어지므로 과거의 원인이나 미래의 상태나 미시적인 것이나 초거시적인 것에 대하여는 논리적 유추로 다루어지게 되므로 유추과정에서 유추적 해석의 오류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추적 이론들은 진실에 가깝기는 하지만 완전하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는 잘못된 것이 아니고 가장 합리적인 것이므로 확정된 이론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확정된 이론이라고 하여도 이보다 더 원인적으로 합리적인 과학적 이론이나 오류가 있다면 확정된 이론도 수정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과학은 방법론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와 같은 과학문명도 이루어지게 된 것도 수많은 과학적 방법과 오류의 수정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자체에 대하여 논쟁을 가진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진화론”과 “창조론”이 대립되는 것을 보면 이는 “주관적 신념”과 “객관적 탐구 방법”의 대립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는 논리적 대립관계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과학적인 것을 부정을 하려면 방법론적으로 대안을 제시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방법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학적 방법에 오류가 있다면 이 또한 과학적 방법으로 제시를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자체에 대한 것은 논쟁이 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이는 철학적인 것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철학은 우리들의 지식에 대한 것이고, 올바른 지식(진실된 지식)은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철학의 방법도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철학이 따로 있고 과학철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에는 철학적 탐구과정에서 과학적방법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하여 논하였지만 현재에 와서는 이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적 영역내에서 우리들의 삶에 대하여는 “윤리철학”으로 다룰 수가 있는데 이 윤리철학에 대한 탐구 방법도 과학적 방법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적 삶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파악을 하고 취합을 하여 분석을 하고, 또한 각 개인의 심리와 사회적 심리관계를 분석을 하고 취합을 하면서 다루어야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모두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철학적인 것을 다루는데 과학은 가장 합리적인 방법 때문입니다. 만약에 철학적인 것을 다루는데 과학적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이를 제시하고 과학적 방법과 비교를 하여 논의를 하여야 하는데 사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을 보면, 과학은 가장 합리적인 방법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철학과 과학철학을 구분을 하여 다루는 것은 과거 19세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저는 현재는 이러한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과학에 대한 것은 우리가 다루는 과학적 방법에 따른 오류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즉 과학적 방법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진 결과에 대하여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은 우리의 지식에 대한 것이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지식적으로 살고 있으므로 우리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것은 철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 전체가 철학적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물리학과 화학과 같은 물질적인 것(또는 기계적인 것)에 국한을 시키고 다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감정과 같은 것은 주관성과 같이 각자 다르게 나타나고, 우리자신은 각자가 나름대로 고유성을 가지고 살아가므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고유 가치를 가지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가 있는데(천성천하 유아독존) 이러한 고유적 정체성이 과학적 방법으로 노출이 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하게 느끼게 되므로 과학적 방법에 대하여 부정적 생각에 의하여 인문학적 철학과 과학적 철학으로 구분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현재 의학계나 심리학계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우리의 감정역시 과학적 대상임이 분명해지는 것을 보면 감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인문학적 철학도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적으로 구분된 신체와 내부적 고유한 인식적 사고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으므로 각자 나름대로의 고유성과 정체성은 보존이 되고, 또한 이에 따른 감정(마음)도 고유성이 보존이 되므로 철학이 과학적으로 풀이가 되더라도 인문학적 철학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지식을 가지고 존재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은 철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고 저는 보고 있으며, 철학적 방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과학은 인문철학, 윤리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등과 같은 철학적 대상의 관점에서 분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철학의 전체적인 방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글 솜씨가 없어서 두서없이 써봅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profile
    김형태 2013.08.11 08:26
    장철순 화백님의 치열하게 살아오신 삶과 공부에의 순수한 열정은 저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합니다. 열정에서 우러나온 공부에의 애정은 모든 것을 잠재우게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했던, 인천해석 첫 모임을 힘겨울 때마다 떠올려 봅니다.

    보어가 그의 학생에게 한 말, "You are not thinking. You are just being logical."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학교를 떠난 우리의 공부는 이미 정해진 고정된 해답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풀이 과정을 찾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공부, 진정으로 각자 자신의 삶 속으로 녹아 들어오는 공부가 인천모임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남은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불모지 변방의 인천모임이 한가한 친목모임으로 전락하는 것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시간과 자원은 각자 더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삶을 함께 나누는 인천모임이 무의미한 지적 허영을 채우는 유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천멤버 중에서 저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이자, 사람에 대해 환멸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 번 모임이, 제가 백북스 공간에서 지역모임을 준비하는 변방총무로서의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첫 모임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정말로 보다 의미있고 소중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 번 인천모임의 주제는, 과학이란 무엇인가 와도 연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우회로(迂廻路)의 문제로, 과학에서 물리학 성립 시기에 수학의 기여, 물리학 분야의 통합에의 이해와 통찰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절한 비유는 될 수 없지만, (현대물리학 분야는) 오늘날 현대중국이 5~6개의 독립된 국가가 아닌 하나의 단일 국가로 유지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공부에서 무의미하고 낡은 질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무수한 메시지 중에서 자신의 일부를 찾아내는 안목을 키우고, 행간의 놓친 부분을 함께 메우는 인천모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객기에 너그러운 용서를 구합니다.
  • ?
    장철순 2013.08.11 08:26
    김형태 총무님 고맙습니다.
    참다운 지식과 지혜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준비하시느라 매번 노력하시는 것에 대하여 회장님과 회원님들과 더불어 항상 감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모임이 소규모이여서 초라하더라도 그 가치는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적은 인원이지만 저만 빼고는 회원여러분들의 학식이 매우 높으신 전공자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천독서 모임에서 논하는 것이 결코 지적허영에 따른 유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저도 미력하나마 인천독서모임이 활성화되는데 좀더 노력을 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파이팅 하여 봅시다.


    그리고 과학을 물리학에 국한을 시켜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과학이 16~18세기경에 수학적 서술방법으로 자연과학으로 성립이 되었지만 현재의 대부분의 학문에서 학문적 지식에 대하여 논하는 방법이 “논리실증주의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보면 이는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실증주의가 과학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논리실증주의가 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 또한 논리실증주의로 증명이 된 것이므로 <논리형식=과학>이라고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다루고자하는 대상의 관점에서 내포된 원인적 속성과 이에 따라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이해를 하고 정리를 하여 원리적으로 이해를 하거나 이렇게 이해가 된 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응용을 하여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루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으로는 논리적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 논리적 방법은 연역과 귀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모두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논리형식이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원리적으로 이해를 하는데 매우 합리적이라는 것이 초기의 자연과학과 같은 것에 의하여 증명이 되므로 논리실증주의가 탄생을 하게 되고, 이를 과학이라고 부르므로 <논리형식=과학>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 까요?
    이는 과학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논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다루어지는 모든 것은 과학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대부분의 학문은 논리형식에 따라서 다루어지는데 특히 논리실증주의적인 관점에서 근거하여 다루어지는 것으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과학적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논리적 형식과 과학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논리형식과 과학은 구분이 됩니다. 이는 “논리실증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증과정에서의 시공간적으로 관측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밖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의 영역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형이상학적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논리적 추론에 의존을 하게 되는데, 이때 추론의 근거가 논리실증주의적으로 다루어진 것에 근거를 하여 유추를 하게 되므로 추론적 논리역시 논리실증주의적인 것에 따른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과학을 “논리실증주의적”이라고 보면 논리형식은 보다 포괄적인 것이라고 구분을 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방법론적으로는 같은 것이므로 결국에는 논리형식은 과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논리형식=과학적 방법>이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물리학과 초끈이론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물리학은 대체로 논리실증주의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물리현상의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는 아직은 알 수가 없는 부분이 많으므로, 물리적 상태에서 근원적인 상태인 소립자에 대한 원인은 추론적인 수리적 해석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초끈이론이라고 할 수가 있으므로 이때 근거가 양자역학에 따른 실증적인 것을 기초로 하여 추론적인 수리적 해석으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논리적 추론도 근거는 실증성에 기반을 한다고 할 수가 있으며, 이는 방법론적으로는 “논리실증주의적”인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은 알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하여도 논리실증주의에 따른 것을 근거로 하여 유추적인 추론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으므로 방법론적으로는 결국에는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과학은 지식에 대하여 탐구하는 방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논리형식으로 다루는 것은 모두 과학적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에 대한 탐구는 과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보면 현대철학도 이미 과학적으로 다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을 과학철학으로 구분을 하고 다루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철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철학서들은 대부분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지는 철학에 대하여 논하고 있지 과학자체에 대하여 논하고는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이 무엇인가?” “과학적방법이 옳은 것인가”와 같은 논쟁은 이미 끝났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논쟁이 끝난 시점을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1922년>에서 대체로 정리가 되었다고 보고 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직접 논한 것은 아니지만 논고 내용의 전개방법과 의미로 보면 이와 같이 저는 해석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대하여 의미와 방법론적인 관점에서도 함께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이 난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인식적 사고에 따른 지식을 기반으로 살아가는데, 이때 대부분의 지식은 언어적 개념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언어적 개념으로 소통을 하고 살아가는데, 이러한 언어에 대하여 개념이나 속성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논리적 분석을 한 것으로 이 논고자체가 논리적인 과학적 방법으로 논한 것으로 언어의 명료함과 모호함에 대하여 논리적 방법을 제시를 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논고자체가 과학적 방법으로 “논리실증주의적”인 것과 이에 따른 한계에 대하여 논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논리적 방법론으로 한계를 규정을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전기에는 언어에 따른 논리적 한계 (모호함)를 강하게 주장을 하였지만<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후기에는 방법론적으로 열린 상태로 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이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자 “노먼 맬컴”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철학을 공부하여 얻는 효용이 그저 어떤 심오한 논리학의 문제 등에 관해 어느 정도 그럴 듯하게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생각을 개선시키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위험한 말 되거나 우리를 더 양심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확실성, 확률, 지각 등에 관해 잘 생각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안다네. 그러나 우리 각자의 인생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 진정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훨씬 더 어렵기 마련이지.” (생략)
    라고 말한 것을 보면 <확실성, 확률, 지각 등에 관해 잘 생각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안다네> 또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 진정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훨씬 더 어렵기 마련이지.>라고 말한 것은 언어적 의미와 과정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인 사실적 진실의 관점에서 보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으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분석의 과정이 논리형식에 따른 과학적 방법으로 논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으며, 방법론적으로는 한계를 규정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언어적 분석이 어떻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또는 과학적 방법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종지부를 지웠다고 제가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요?
    이는 지식에 대한 철학적 것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논쟁이 큰 것이 언어적 개념에 따른 의미와 언어적 형식구조에 따른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존재, 사실, 실체, 진실, 등등의 문제가 모두 언어적 개념에 의한 것에서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철학적 언어에 대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논하므로, 이전에 과학적 방법은 사물과 같이 구체적인 객관적인 것에서 만 다루었는데, 언어에 따른 개념과 같은 추상적인 것에 대하여도 과학적 방법으로 논하므로 과학적방법이 옳다는 것을 증명을 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이란 무엇인가?> 와 <과학적 방법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과학은 방법론이며, 과학적 방법은 합리적이라는 것을 증명을 한 것이 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철학에서는 과학자체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과학적 방법으로 해석한 철학에 대하여 논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양자역학에 따른 “불확정성”과 수학적으로 말하는 “불완전성”에 따라서 논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과학이란 무엇인가?><과학적 방법이 옳은 것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이후에는 거의 정리가 되었다고 보고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번 독서모임의 주제인 현대과학철학의 논쟁에 대하여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을 하여보고자 합니다. 즉 과학을 방법론적으로 보는 저의 견해가 옳은 것인가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모임도 저에게는 많은 공부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긴 글을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
  • profile
    주민수 2013.08.11 08:26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에 대해서까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이 방법론이라는 장철순님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더나아가 저는 '철학'도 또한 방법론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이나 '사회철학'과 같은 조어에서 보듯이, 이미 '과학'과 '철학'은 그 시원에서 보였던 분야성을 벗어나 이제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자리매김 했다고 봅니다. 즉 '과학'과 '철학'은 탐구의 방법론을 의미할 뿐이며 이러한 방법론이 적용 범주와 결합할 때 비로소 영역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하나의 전문분야가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방법론을 방법론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과학철학'이란 사실상 의미가 없는 전문분야라고 생각합니다.
  • ?
    장철순 2013.08.11 08:26
    저의 견해에 대하여 의견을 주신 미선님과 주민수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혼자만의 생각으로 지내 왔는데 제 생각에 대하여 비교를 할 수가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미선님의 견해에 대하여 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형식논리학이나 수리논리학만을 과학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논하려면 조금 유치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논리란 무엇인가부터 설명이 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가 <논리형식=과학>이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논리(論理)란 용어 그대로 보면 말(음성언어와 문자언어 포함)로 논하는 원리 또는 방법이라고 알 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리의 관점에서 보면, 언어적 의미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어는 어떠한 의미(정보)를 전하거나 소통을 하는 것이므로 논하는 원리나 방법에 대한 것은 언어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을 하고 의미를 올바로 전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논리에서 대상은 언어에 따른 모든 대상이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단어적 대상”이나 “문장적 의미의 대상”이나 모두가 논리적 대상이라고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어적 대상의 관점에서 원리적으로 보다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논리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논리는 두 가지의 관점에서 볼 수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1)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또 하나는(2)이렇게 만들어지고 의미를 가지는 언어로 어떻게 소통을 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1)은 현재까지 다양한 학문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언어는 우리의 인식적 사고에 따라 표상화 된 것을 언어로 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는 우리의 신체내부에서 주로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저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식적 정보에 따라서 표상화 된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언어로 표현된 것에도 의미가 부여되어 언어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단어나 단어의 조합인 문장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는 기본적으로 음성의 소리패턴으로 표현이 되는데 각자의 인식적 사고에 따라 표상화 된 의미가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에 대하여 같은 음성의 소리패턴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 언어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성의 소리패턴은 따른 언어는 지역의 문화권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발전이 되어져 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인식적 사고에 따라 표상화 된 의미는 대부분의 인류가 대체로 같은데 언어적 표현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므로 언어적 의미는 대체로 같은 상태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2) 앞의 예를 보면 언어는 우리의 인식적 사고에 따라서 표상화 되는 의미를 언어로 소통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적 소통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인식적 사고에 따른 것으로 인식과정은 신체내부(뇌)에서 이루어지는 인지, 기억, 판단으로 표상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표상화 과정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인지되었다는 것, 기억이 되었다는 것, 판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도 이미 표상화 것만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뇌 과학자들은 인식과정에 대하여는 스스로 아는 것은 극히 일부만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판단이 이루어져서 표상화된 상태로만 안다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식을 꼭 안다는 것만으로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 즉 “의식적 인식(안다는것)”과 “무의식적 인식(의식적으로 알지 못하는 인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인식적 정보는 대부분 감각신경계를 통한 정보를 기반으로 사고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유추적 인식”과 “추론적 인식”도 대부분 감각신경계를 통한 정보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감각신경계를 통한 정보는 실시간적으로 이루어지므로 기억이라는 정보의 저장을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기억에 따른 정보로 유추를 하거나 유추과정에서 정보는 없지만 유사한 정보의 상태도 만들어지고 표상화가 이루어지므로 추론적으로 이루어져서 표상화 하는 것을 “추상(推想)”또는 “상상(想像)”이라고 하며, 이를 표현한 것을 추상(抽象) 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식은 인지, 기억,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다는(지식)것은 대부분 표상화 되고, 기억(인식적 정보저장)된 것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가 있으며, 언어로 표현되는 것도 표상화된 정보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적 표현에는 실상(實像), 유추상(반추상), 추상(완전추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표현이 되는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식적 사고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인지적 정보가 부족하거나 기억과 판단의 과정에서 착각이나 개인적 의지에 따라서 외곡을 하는 것으로도 표상화가 이루어지므로 이에 따른 언어적 표현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를 주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관적으로 논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을 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논리라는 형식이 만들어진 것으로 저는 알 고 있습니다.
    이는 주관적인 것으로 논하는 것에는 착각, 판단의 오류, 의도적 외곡(거짓말)과 같은 것이 포함이 될 수가 있으므로 보다 진실의 관점에서 논하고자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또는 진실이라고 인식할 수가 있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객관적이라고 하는 저의 생각은 대상자체에서 오는 정보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고 인식적 대상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상자체에서 오는 정보는 재현성과 실재성을 가지므로 인식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도 인식을 할 수가 있다고 할 수가 있는 보편성을 가지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집단적 착각과 같은 것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집단적 착각 : 저는 언어에 따른 학습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잘못된 일반화 된 지식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논리의 기본형식은 객관적으로 보편성을 가지는 것에 근거와 합리적인 언어체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렇게 다루는 형식이 “연역법”과 “귀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도 우리의 인식적 사고에 의한 것이므로 여기에도 오류가 포함이 되지 않을까하여 “귀류법”이나 “정합법” 귀추법등 같은 것으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도 언어적으로 다루는 것이므로 보다 더 확실하게 하기위하여 “논리실증주의”도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저는 알 고 있습니다.
    그리고 논리실증주의가 보다 확실하게 정착이 된 것이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에 대한 수리적(數理的) 방법으로 다루는 것에서 시작이 된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자연적 대상은 대부분 객관적 현상으로 인식이 되어지므로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이고, 그리고, 수학의 수리적인 것은 양적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에 대하여 수 개념으로 수식(數式)이라는 논리형식으로 비교적 명확하게 정합성을 가지는 것으로 다루어지므로 수리적 논리는 논리적으로 가장 합리적이라고 보는데, 자연현상 중에 사물의 운동과 같은 것을 운동량의 관점에서 수리적으로 다루면 정합성을 가지는 것으로 합리적으로 풀이가 되므로 논리실증주의가 정착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갈릴레이이나 뉴턴의 운동법칙과 같은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의 현상에 대하여 수리적으로 풀이를 하는 것을 자연과학이라 하므로 과학이라는 용어적 개념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그러다 사물의 운동 상태뿐만 아니라 사물의 상태나 현상에 대하여 “물리량”이라는 관점에서 수리적으로 다루어지고 또한 실증성(실험 관찰)으로 증명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므로 과학이라는 개념이 보편성을 가지면서 일반화가 된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은 논리형식에 따른 것에서 논리실증주의로 발전이 되면서 정착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과학은 논리형식에 따른 방법론이라고 보고 있으며, 논리형식 중에 논리실증주의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형식=과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다루는데 과학적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방법이외의 논리적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 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과학적 방법 말고 논리적으로 다룰 수가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이는 저의 화두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저의 견해
    그런데 문제는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는데 있어서 다루는 대상도 모두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객관적인 대상도 우리의 인식적 사고에 따라서 표상화 된 것으로 언어로 나타내므로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는 대상도 언어적 대상에 포함이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언어적 대상의 관점에서도 논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논한 것과 같이 언어는 인식적 사고에 따른 것을 의미적으로 표상화 한 것으로 나타낸 것이므로 언어적 대상자체는 정보의 의미만을 가지므로 실증성을 부여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과라는 단어에 대하여 실재의 사과 말고 언어적 사과에 대하여 제시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이는 인식적 사고에 따라서 표상화 된 의미이므로 제시가 불가능 합니다. 특히 유추나 추리에 따른 것을 제시하라고 하면 이는 더욱 어렵습니다. 혹시 언어에 따른 문자로 나타내면 될 것인가 하겠지만 이는 단순히 잉크분자나 연필분자의 배열형태이고 형태에 따라서 인식적으로 뇌에 의미가 부여가 되는 것이므로 문자 자체는 잉크분자나 연필분자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내일 서울에 간다고 하는데 이를 오늘 실증하라고 하면 이는 불가능 합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는 것이므로 실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측적으로도 단정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일 서울에 갈지 못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빨간 사과가 있다고 할 때 “빨갛다”것이 사과에 색깔이 있는냐 하면 없다고 합니다. 이는 사과의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의 파장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사물이 빨간색을 가지고 잇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물질을 빛의 파장에 따라서 나노크기로 분쇄를 하여 놓으면 같은 물질이지만 크기에 따라서 각기 다른 색깔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빛이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 하며 빛 자체는 광자의 상태로 진동수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색깔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색깔은 빛의 진동수(또는 파장)에 따른 우리의 시각세포와 뇌에서 시각정보를 담당하는 뇌세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므로 색의 본질은 없다고 하며 뇌에서 만들어진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의 원자론으로 보면 원자의 대부분의 공간은 전자가 돌고 있는 빈 공간으로 되어져 있으며, 극히 작은 핵자와 전자도 에너지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소립자의 상태라고 하므로 물체라는 것도 실체는 없고 우리의 감각에 따른 인식적 사고에 의하여 가지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언어적으로 논하는 대상을 실증한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실증이 되어지는 것이라고 하여 “논리실증주의”는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논리학자들도 있습니다. 즉 본질, 실체, 실재, 사실, 등에 대하여 인식에 따른 “허상(虛像)”이라고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가 인식적 사고에 따른 정보가 표상화 된 것으로 의미를 가지므로 인식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논리실증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저의 견해입니다.
    예를 들면 색깔이 존재를 하느냐의 경우에는 복사에너지(빛)의 다양한 파장에 대하여 가시광선영역의 파장이 구분되는 것으로 시각세포를 통하여 뇌에서 이루어지고 이렇게 구분되어지는 것을 색깔이라고 하므로 색깔은 실재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색깔과 복사에너지의 파장을 언어적 의미로 구분을 하여 복사에너지는 있고, 색깔은 없다고 하면 이는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즉 색깔의 속성은 가시광선의 파장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언어적 의미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손으로 만져지는 사물의 실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물을 이루는 원자는 대부분 빈 공간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빈공간이 전자가 움직이고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으므로 전자가 운동하는 공간은 전자에 따른 전자기현상에 따른 에너지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자의 물리량에 따른 외각 전자의 물리상태에 따라서 원자들은 결합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에서 전자가 존재하는 공간(전자마당)은 에너지밀도에 의하여 각원자의 상태는 보존이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물의 상태를 물리학에서는 “강체(剛體)”라고 합니다. 이는 원자를 쪼개려면 굉장히 큰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체라고 하는 것은 우선은 시각적(視覺的)으로 공간적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으로 의미를 하지만 강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실체로 인식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식적으로 보면 실체는 분명히 존재를 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으로 공간적으로 구분된 강체로 인식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강체의 상태를 물질의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물론 강체의 본질은 원자의 물리적 구조와 이에 따른 물리적 현상에 있겠지요

    이러한 예로 보면 본질, 실체, 실재, 사실, 등에 대하여 인식에 따른 “허상(虛像)”이라고 보는 것은 언어적 속성의 의미를 잘못 이해를 하거나 아니면 보고자 하는 각자의 의지에 따라서 외곡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언어는 우리의 인식적 사고에 따른 정보를 취합하여 필요에 따라서 표현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언어의 개념체계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적 의미는 정보의 상태로만 되어있으므로 언어자체의 상태는 실체성도 없고 실재성도 없고 단지 정보의 의미로만 그것도 의식작용에 의하여 표상화 되어 나타날 뿐입니다.
    하지만 인식적 정보의 의미에 따른 대상의 관점에서 보면 본질, 실체, 실재, 사실, 등은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용어도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언어적 의미로 보면 추상화된 것에 따른 용어도 있으므로 이러한 용어의 의미적 대상은 인식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본질, 실체, 실재, 사실,이라는 것이 적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들어 인식작용에 따른 언어적 의미의 대상을 언어의 관점에서만 보아서 언어적 대상은 모두 허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마무리는 어느 스님이 말한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글 솜씨가 없어서 장황하고 난해하게 길게 설명이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명확한 근거(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예)를 제시 않고 글을 쓴 것에 대하여도 양해를 바랍니다. 이는 글이 좀더 복잡해지고, 저의 견해가 쉽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자격지심에서 저의 견해로만 글을 쓰게 된 것이므로 양해를 바랍니다.




    * 미선님께서 나중에 쓰신 글에 대하여 몇 가지 물어보고자 합니다.
    <사유를 “인식적사고”로 보아도 될 까요 ?>
    <과학이 수리적 방법으로 철학적 방법론의 일부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철학적 방법은 어떠한 것들이 있나요?>
    <비과학은 비논리적으로 보아도 될 까요?>
    <종교철학은 과학철학으로 다룰 수 없는 영역인가요?>

    죄송 합니다 괜한 질문을 드리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도 궁금해서 여쭈어 봅니다.

    사색(思索)하기 좋은 가을이 왔습니다.
    미선님을 비롯하여 백북스회원 여러분들도 보다 건강에 유의하여 좋은 사색을 하기를 바랍니다.
  • ?
    엄준호 2013.08.11 08:26
    토론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것이 많아 즐겁습니다^^
    제 생각에...
    과학이나 철학이 분명 세상을 이해하고자하는 방법적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방법을 통해 얻어진 직접적 성과물들과 성과에 대한 해석 이를 통해 얻어진 새로운 통찰 등도 다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전자가 진정한 과학이고 후자들은 과학의 산물일뿐이라고 말씀하실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양자를 다 아우르는 것이 과학이요 철학이 아닐까요? 즉 방법과 내용 모두
  • ?
    장철순 2013.08.11 08:26
    미선님 답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과학의 정의를 지나치게 확장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제 주장이 더 큰 설득적인 타당성을 지니려면 기존의 언어학과 논리학에서도 다루지 않는 과학으로서의 차별성이 필요하고 이를 제시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언어와 이에 따른 논리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까?
    저는 과학도 전부 언어적으로 다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이나 상태가 나타나면 이를 언어적으로 표현을 하고 이에 대하여 논리실증주의의 형식에 따라서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어학과 논리학에서도 다루지 않는 과학으로서의 차별성이 필요하고 이를 제시하여야 한다고 하므로 어떠한 차별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가 무식해서 모르 것인지 몰라도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형식논리도 논리학 범주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또한 논리실증주의도 형식논리학에 포함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논리는 논리학에 포함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그래도 가장 확실한 것이 논리실증주의에 따른 과학적 방법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도 제가 잘못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런데 언어에 따른 대상 중에는(명제) 존재는 확실한데 과학적 방법으로는 아직은 다 다룰 수가 없는 것이 있으므로 논리실증주의적으로 다루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아직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언어적 개념, 마음, 정신, 자유의지, 심리 등과 같은 것들이겠지요.
    그리고 이에 대하여 보다 원인적인 논리로 다루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그래도 가장 확실하다고 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이에 대하여 탐구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뇌 과학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논리는 언어에 따른 대상(명제)에 대하여 보다 원인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으로 논리형식적 방법으로 다루어지며, 이러한 논리적 형식이 말(언어)로만 다루어지는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자연과학에 의하여 논리실증주의가 제시가 되고 과학적 방법이 그래도 가장 논리적인 것이라고 인정이 되어 현재는 과학이 대세를 이루어 있다고 저는 보고 있으므로 과학적 방법에 기대를 하고 있는 편이므로 과학의 정의를 확대 해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는 과학적 방법 말고 다른 합리적인 논리적 방법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러한 생각을 바꿀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결과에 대하여는 신뢰를 하고 있는 편은 아닙니다. 이는 과학적 방법에 대하여는 신뢰를 하고 있는데 기존의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결과에 대하여는 오류가 포함이 되어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는 신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리학에서 물리적인 근원상태인 미시적 물리상태에 대한 기존의 양자역학적 풀이는 제가 보기엔 분명한 수리적 해석의 오류가 포함이 되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에 양자역학에 따른 물리적 개념에는 동의를 하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실재 reality 와 실체 substance에 대하여 철학적으로는 이미 해결이 되고 규정을 하고 다루는 것과 같이 설명을 하고 계시는데, 이에 대하여 저의 견해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을 고수하고 있는 편입니다. 이에 대하여 논하려면 양자역학적으로 논해야 되므로 이에 대한 것은 생략을 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는 저 나름대로의 철학사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사전의 개념들이 아직은 옳은 것이지 틀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보고 있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적 지식에 대하여 나름대로 사유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4가지 질문에 성심껏 답하여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답변을 보고 의문점이 생겨서 다시 질문을 하여 봅니다.

    1) 사유와 인식적 사고에 대하여 자기구성활동과 생리학적으로 설명된 것에 동의 합니다. 의문은 사유와 인식적사고의 재료(근거)가 같은 것이냐는 의문입니다. 만약에 같은 것이라면 동일하게 보아야 하지 않을 까요?

    2) 일단 제가 질문을 잘못 드렸네요, 과학을 철학방법의 일부라고 하신적은 없습니다. 다만 구분이 되어진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과학이 측정 범주 안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측정가능하게 하려는 노력도 있습니다.
    따라서 측정 범주 안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결과론적인 것이고, 과학의 탐구목적으로 보면 측정가능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닐까요?
    그리고 철학적인 것이 광범위하게 가설적으로 다루어진다면 과학적방법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철학의 꽃이 형이상학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형이상학이 지식으로 밝혀지면 철학적 꽃이 지는 것입니까“ ^ ^

    3)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하여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이것이 종교철학으로 과학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받아 드릴수가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빅뱅이론과 유전자이론에 근거 하신 것인가요?

    그리고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장이야 라는 명제로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 대해 언술한다는 건 근본적으로 객관성을 갖기 힘든 한계가 있으며, 이에 따라서 논리실증주의 학파들은 역시 한계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하여 저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설문제는 언어적 문제이지 과학적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수리적인 것에서는 역설적인 것을 피해 갈수가 있다는 것에서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는 러셀의 집합론의 역설을 제기하면서 이를 피해가는 계형이론을 제시합니다. 또한 J.노이만의 공리론적 집합론,도 있으며 이밖에 여러 가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성이론에 따른 쌍둥이 역설이나 제논의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분할문제 역설은 이미 오류라는 것인 분명히 밝혀진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학논리나 과학에서 역설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양자역학에 따른 패러독스는 남아있지만 이에 대하여는 저는 동의를 하지 않고 있으므로 양자역학적인 것에 따른 것 빼고는 현재까지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진 것에서는 역설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역설문제는 언어문제로 언어적으로 반대되는 의미의 용어(배리. 역리적 관계용어)를 논리적으로 결합을 하여 하나의 문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즉 거짓말쟁이 역설에서 보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적 말에 반대되는 용어이므로 거짓말장이야 라는 의미는 사실적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모든” 크레타 사람이라고 칭하므로 “모든” 속에는 거짓말과 사실적인 말 두 가지가 모두 포함이 되는 것이므로 결정을 할 수가 없는 모순이 포함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모순이라는 말 자체도 창과 방패의 반대적 의미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상대적 관계에서 반대되는 의미의 용어로 서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명제를 하나로 만들면 모두 역설에 빠지는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반대되는 의미의 용어는 상대적인 관계로 다루어져야 하지 하나의 명제로 다루는 것은 논리상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 있는 편입니다.

    4) 철학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고, 종교철학과 과학철학이 관점이 다르다고 보면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이고 보는 관점만 다르다는 것으로 보아도 될까요?
    즉 종교철학은 각 종교에 따른 교리에 따라서 각자의 종교적 신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보아도 될까요?
    그리고 과학철학은 측정 가능한 것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결과론적인 것이고 측정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가면서 탐구를 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될까요? 예를 들면 우리의 뇌에서 이루어지는 정신현상에 대하여 이해를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관측 장비로 측정을 하여 수치화를 하여 비교 분석으로 하거나 좀더 세밀한 측정 장치를 개발하려는 것으로 보면 과학은 측정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가면서 탐구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는 과학이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만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방법으로 결정을 하여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을 까요? 그래서 과학적 탐구는 계속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와 같이 보면 종교철학과 과학철학은 세상을 보고자 하는 관점이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종교철학이 각 종교교리에 따른 결정론적이라고 할 수가 있으며, 과학철학이 탐구해가는 지향성을 가지는 철학이 아닐까요?
    그러면 과연 어느 관점이 보다 합리적일까요?


    물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환경에 의하여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저는 보고 있는데 올바른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적 지식은 극히 좁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와 이에 따른 정보교류(교육, 또는 보고 배움)로 우리의 지식은 확장이 되어지므로 우리의 사상도 교육적, 지역적, 환경적으로 집단성을 가지게 되므로 사람들의 사상을 절대주의, 상대주의, 관념주의, 유물론주의, 등등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으며, 이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관점도 각기 다르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지식이 확장이 되고 이에 따라서 사상도 바뀌게 되지만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지식의 영역이 매우 많으므로 형이상학적 문제는 항상 남아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데카르트나 유교적 형이상학과 같은 문제는 근원적인 문제들로 지식적으로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정리가 안 되었으므로 지속적으로 이어고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현재도 여러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에 대하여 각자의 인식적 사고(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서 사유를 하고 있는 것이 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선님의 글을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그리고 미선님에 대한 저의 느낌인데 혹시 “형이상학”이라는 문제를 인간의 지식범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식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이에 대하여는 한계를 규정하여 놓고 형이상학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여기에 맞추어서 우리의 지식적 탐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이 미선님의 글을 읽다보면 이러한 내용은 없는데도 자꾸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과학적 사고에 너무 얽매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글도 쓸데없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설프게 아는 것으로 장황하게 쓴 것에 대하여 죄송합니다.

    따라서 저의 견해에 대하여 꼭 답을 안 하여 주셔도 됩니다.
    답을 해주시면 고맙겠지만 . . . ^ ^
    다만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인간도 있구나 하는 것으로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을 하겠습니다.
    항상 미선님의 다른 글들을 보고 많은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 ?
    장철순 2013.08.11 08:26
    미선님 답변에 많은 공부가 되어 감사드립니다.

    무식한 제가 자꾸 귀찮게 하여 죄송합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철학에서 핵심은 크게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 대하여 다루는 학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는 화두가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형이상학에 대하여 제가 올바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철학을 혼자서 공부를 하면서 주로 서적과 인터넷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은 사유(생각)를 할 수가 있게 하는 밑바탕 또는 사유를 근거를 이루는 궁극의 질문, 또는 사유 공간 내에 알지는 못하지만 존재하는 것으로의 지식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을 형이하학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지식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인 형이하학적인 것은 대체로 보편성과 구체성을 가지므로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물론 감각적으로 이루어지는 대상도 내포된 것에 따른 것은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모호함도 가지지만 겉으로는 그래도 구체성을 가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적인 것은 존재는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보이므로 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모호함(?)을 가지므로 그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논하면서 다양하게 해석을 하고 규정을 하여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것이나 형이하학적인 것이 우리의 인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인식론적으로도 다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러면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형이상학적 문제는 대부분 우리의 인식에 의하여 발생을 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까요? 즉 감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형이하학적 지식(정보)은 대부분 외부에서 유입되는 정보이므로 객관성과 보편성을 부여하기가 쉬운데, 이렇게 유입된 정보에 의하여 뇌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적 판단(유추, 또는 추리)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문제가 발생을 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과거에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실증주의 철학이 일부 모순이 있어서 부정이 되기는 하지만, 현재의 과학철학에서 뇌과학으로 탐구를 하여 가는 것으로 보면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하여 실증주의 철학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쭙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또 한가지 이유는 인간의 인식적 사고에 따른 사유는 제가 알기에는 말이 조금 이상 하지만 “의식적 인식”이 있고 “무의식적 인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의식적 인식”은 우리가 아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무의식적 인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인식 중에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은 일부이며, 대부분의 인식은 “무의식적 인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고, 이러한 인식과정에는 우리의 의지도 개입이 되므로 이러한 인식과정에서 우리의 형이상학문제가 발현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도 볼 수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형이상학문제가 인간자체의 문제라는 것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 무식하고 난해하게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쓸데없는 질문은 안하고 좀더 열심히 배우기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4 자료 [조상이야기] 엔사티나 에슈솔치 4 변정구 2011.01.06 134156
483 자료 [생명,40억년의 비밀] 참고자료 (1) 변정구 2011.08.20 99528
482 자료 [퀀텀브레인] canonical cortical microcircuit 1 file 변정구 2011.02.17 91889
481 자료 <뇌과학> Two Streams hypothesis 4 file 변정구 2011.06.02 77152
480 자료 [시냅스와 자아] 편도체 amygdala 변정구 2011.03.11 62364
479 자료 [조상이야기] 랑데뷰 1 - 15 : 포유동물 Mammalia file 변정구 2011.02.19 54533
478 자료 [생명의도약] 참고자료 변정구 2011.06.27 48849
477 자료 [산소] 참고자료 변정구 2011.06.19 44653
476 자료 [이보디보] 참고 자료 변정구 2011.05.27 36514
475 자료 [미토콘드리아] 참고자료 변정구 2011.06.30 32751
474 자료 [퀀텀브레인] 목차, 참고자료, 찾아보기 1 변정구 2011.02.20 22440
473 자료 [인문학에게 뇌과학을 말한다] 보충자료 변정구 2011.05.18 22140
472 공지 인천백북스 / 인천 해석 21 김형태 2012.03.07 17412
471 공지 11/2 (일) 인천백북스(강독) 묵자 읽기 5회 (공지) 1 file 김형태 2014.05.12 11074
470 공지 인천백북스 / 인천 해석, 의견이나 제안을 남겨 주세요. 8 김형태 2011.09.27 7977
469 자료 밀리시버트(mSv). 베크럴(Bq) 변정구 2011.03.18 7135
468 후기 무동력 비행 3년을 마무리 하며 2 김형태 2014.09.01 6190
467 자료 [마이크로코스모스] 참고자료 변정구 2011.07.17 5781
466 자료 [생명이란 무엇인가] 참고자료 3 변정구 2011.07.09 5633
» 공지 9/13 (금) 제55차 <현대과학철학 논쟁> (공지) 27 김형태 2013.08.11 561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5 Nex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