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

by 임석희 posted Apr 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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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앉아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별로 없는 봄입니다. 둘러보니, 시도록 하얀 벗꽃도 지려하고...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생동감 넘치는 봄기운을 그냥 맞이하기만은 어려워... 늦었지만, 첫 봄을 맞이하던 그 느낌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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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 - 어느 봄날 집으로 가던 길에, 나로도에서 남도까지 




어느덧 3월 중순이다. 신선한 봄의 향기 끝자락을 맡으며 이곳에 내려왔으니, 내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어느덧 1년이 되어가나 보다. 로켓 발사를 위한 막바지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하루하루. 때론 하루 종일 화장실도 못 갈만큼 바쁜 일상이지만, 매일 걷는 출근길의 자연은, 그리고 매주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남도의 자연은 바쁜 길을 재촉하는 나에게 또 다른 여유의 기쁨을 선사한다. 1년 전, 분명 봄에 내려왔건만, 어느덧 작열하는 남태평양의 바다를 보여주었던 나라도는 금새 억새풀로 뒤덮였고, 눈발이 날리는가 싶더니만 다시금 3월이다.




봄은 유자와 함께 시작되었다. 겨울이 끝나가던 어느날, 나뭇가지는 크고 싱싱한 초록 열매를 달고 있었다. 그 초록 덩어리는 점점 노랗게 물들더니만, 결국 유자가 달린 걸 목격하게 되다니! 집집마다 달린 유자는 대전에서 내려온 우리와 같은 타지인에게도,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에게도 생소하고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달리는 차에선 맡을 수 없지만, 분명 그 집앞은 그 동네 앞은 유자향기로 겨울을 마무리 하는 중이었을게다. 이렇게 나라도의 봄은 시작되었다.


 


고흥 특히 외나로도는 동백으로 유명한데, 가끔은 이게 나무 맞나 싶을 정도로 굵은 동백도 있다.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빨간 장식이 얹혀져 있는 것처럼, 동백꽃은 푸른 나뭇잎 사이사이에서 새빨갛게 반짝인다. 동백잎은 기름이 줄줄 넘치고, 붉은 꽃은 크리스마스 트리 같고, 흩날리는 동백꽃은 마치 장미잎을 따다 던져 놓은 것 같다.




우주센터는 다도해해상 국립공원 안에 지어져있다. 그만큼 섬 전체가 수목이 울창한 곳이다. 일제시대에 심어졌다는 삼나무 숲과 이곳에서 자생하는 동백나무 군락들, 그리고 소나무 군락은 고흥이 자랑하는 8경중의 하나다. 하지만, 로켓 발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부 나무를 뽑아낼 수밖에 없었고, 길을 내기 위해 산을 깍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이 곳. 문명과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듯한 이곳에 최첨단 발사시설이 들어서 있다. 얼핏보면 삭막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다행히 산이 깎인 곳엔 온갖 들꽃씨앗이 뿌려졌고, 나라를 위해 어쩔수 없이 벌거벗을 수 밖에 없었던 봉래산의 황량한 벌판엔 가을이 지나도록 여러 종류의 들꽃들이 피고 지고를 반복했다. 이곳 근무자들에겐 이런 자연 풍경이 또 다른 눈요깃거리가 되곤 한다. 




바닷바람이 따뜻하다. 며칠 전 사납게 몰아치던 파도는 밤새 잔잔해졌다. 이번 주는 황사로 바다도 흙안개에 뒤덮여 있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갠 하늘이다. 신선한 바닷바람과 아침 햇살을 맞으며 출근하는데 만난 오늘의 첫 손님은 유채꽃.
 


어제 본 드라마에서 제주도의 유채밭이 나왔는데, 그래서였을까? 얼마전부터 분명 피어 있었을 것처럼 이미 만개했는데, 나는 이제야 출근길의 유채꽃을 인식한다. 분명 어제도 그제도 그 자리에 있었건만, 오늘 아침에서야 인식하다니! 인식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서 존재한다는 실존철학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리고 떠 오르는 김춘수의 시 “꽃” 그대가 꽃이라 이름 부를 때에서야 존재할 수 있었던 그 꽃이 바로 이 꽃이구나...




아직 몇그루 되지 않아 유채 향기까지 맡을 순 없지만, 싱싱한 노란 유채꽃과 푸른 줄기를 보면 나 자신이 건강하게 느껴진다. 다음 주면 더 많은 유채꽃이 피어나겠지? 다음주의 출근길이 기대된다.




오랜만에 이른 시각에 나로우주센터를 떠난다.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다.


꼬불꼬불 마을까지 넘어가는 길은 온통 무언가 생의 에너지를 가득 품은 연둣빛의 천국이다. 산 사이로 나 있는 자동차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은 온통 새순으로 가득한 연두의 천국이다. 지난 주만 하더라도 윤기 넘치는 새 잎에 눈에 부셨더랬는데, 오늘은 이름모를 가지들의 새순으로 황사의 우울함을 단방에 날리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진다. 반짝이는 동백잎에 눈이 부신탓인지, 꽉찬 힘으로 솟아나는 연둣빛에 울컥해서인지 난 잘 모르겠다.




나라도를 넘어 육지로 가는 해창만에서.


어느덧 바다는 물이 빠지고, 그 자리엔 갯벌만이 외롭게 있다. 하지만, 그 갯벌 주변은 온통 초록으로 넘친다. 마늘로 유명한 고흥은 겨울에도 항상 밭이 초록색이다. 남도라도 해서 매서운 겨울바람이 비켜가지는 않는다. 지난 겨울 서울이 영하 10도를 내려갈 때 이곳도 영하 7도를 내려갔다. 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밭은 늘 푸르렀다. 이게 무슨 풀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씩씩한 마늘로 자라고 있다. 역시 생명력은 대단한거다. 꼬불한 운전은 힘들지만, 이런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바다를, 연두를, 초록을, 그리고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할 수 있다니!!




순천으로 넘어가며..


지금 남도는 매화로 넘친다. 창문을 열면 매화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사진을 찍고 싶지만, 흔들리는 차안에선 영 원하는 모습이 얻어지지 않는다. 사진찍기를 포기하고 그냥 얌전히 눈으로 구경만 실컷하기로 작전을 바꾼다.


매실이 유명한 건 광양이다. 얼마 후면 매실 축제가 열리겠지.


작게는 집 앞의 매화 나무 한그루가, 조금 더 많은 곳은 동네 곳곳이, 가로수가, 또 어떤 곳은 작은 언덕 전체가 매화나무다. 빈 자리가 있는 곳이면 틈틈이 매화로 가득한 곳이 남도다. 도시에서 흔히 보는 벚꽃의 흐드러짐과는 사뭇 다른 이 느낌. 작지만 탄탄한, 많지만 결코 흐트러짐이 없는 그런 모습의 매화꽃이다. 그래서 사군자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차에 몸을 싣고 순천, 곡성, 구례를 거처 남원을 지난다.


이 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이다. 운이 좋으면 섬진강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를 만날 수 있다. 오후라면 지는 석양이 기차를 넘어 강으로 그림자 지는 것도 일품이다.




곡성에 이르자, 밖은 온통 노란 천국이다. 산수유.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 서식지 답게 마을 전체가 노랗다. 예전에 교과서에 실린 시에서만 만났던 산수유. 빨간 산수유 열매만 기억하고 있는데, 그 꽃이 이렇게도 포근한 노란 색이구나..


그 산수유가 이렇구나..산수유가 남도 곳곳을 따듯하게 감싸고 있다.


개나리가 벚꽃처럼 흐드러지는 부류라면, 산수유는 매화처럼 단아한 부류인 듯 하다.




신선한 봄내음을 정신없이 바빴던 와중에도 한 숨만 돌려보면, 언제나 자연은 내게 말하는 듯하다. 이제 차창 밖 해는 완전히 졌다. 자연이 쉴 시간이다. 나도 이젠 쉬어야 겠다.




기차에 오르자 이 감동들이 사라질새라 컴퓨터를 켜고 타이핑하다.. 2009.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