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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覽强記 - 엘리티즘을 경계한다

by 강신철 posted Jan 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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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강기(博覽强記)란 글을 널리 읽고 기억을 잘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삼국지에서 원소가 박학다식한 조조를 두고 한 말이다. 박람강기하다고 해서 현실인식이 정확하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균형적인 시각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을 할 때도 자주 인용되는 사자성어이다.

 







공부름 많이 한 학자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에 하나가 엘리티즘이다. 엘리티즘은 인간의 가치를 지적 능력과 지식의 양으로만 재려고 하는 성향을 말한다. 소위 일류대를 나왔거나 학식을 많이 쌓은 사람은 자기보다 학력이 낮거나 지식이 일천한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도 한 때 소위 명문대를 나와 외국박사학위를 가졌다는 어줍지 않은 엘리티즘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참담함과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난 엘리티즘이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학식과 인품은 비례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인품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둘 다 지난한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고귀한 것들이다. 진정한 독서란 학식도 쌓고 인품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되는 책읽기를 말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학식을 쌓을수록 겸손해지고 관대해져야 한다. 이성의 칼날을 아무데서나 휘두르지 말고, 지식을 뽐내어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이며,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엘리티즘은 덜 익은 식자들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비(?)식자들에 의해 더 확대되고 옹호를 받고 있지는 않나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정작 지식인은 가만히 있는데, 어쩌다 조직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칠만한 권력을 가지거나 재력을 쥐게 된 비식자들이 거의 맹신적으로 엘리트들을 떠받드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신흥부자들이 그렇고, 대형교회 목사들이 그렇고,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그렇지 아니한가? 책을 읽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지 반성해 볼 일이다. 

 







나는 우리 독서애호가들이 천박한 엘리티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극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사회와 조직이 좌지우지되고 지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식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지식의 양에 의해 인간성이 평가되고 인간의 가치가 저울질 당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책을 읽고 사랑하되 책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나 석가가 책을 읽어서 성자가 되었는가? 현대 세계에서도 인도의 성자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자연을 텍스트로 삼아 인간지성의 최고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농사만 짓고 평생을 살아온 시골 촌부가 하버드대 박사보다도 인품이 더 뛰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만 자연을 텍스트로 삼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멀고 험난하기에, 조금이라도 편해 보려고 또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해 보려고 책이라고 하는 文明 수단을 발견하여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책을 읽는 우리는 박람강기함을 뽐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지식인이 되려면, 자기보다 지식이 모자란다고 해서 무지한 사람을 우습게 봐서도 안 되고, 엘리트로 인정받는 사람들끼리만 무리를 형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스스로 지식으로 인한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한편 자신의 학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지적 열등감에 사로 잡힐 필요가 없으며, 그저 책을 읽으면서 배우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마음으로 독서에 임해야 한다.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엘리티즘을 표방해서도 안 되고, 엘리티즘을 추종해서도 안 된다. 지식의 양과 인간의 가치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만약 박람강기할수록 오만해지고 고집스럽고 편벽해 진다면 그런 사람은 차라리 책을 안 읽는 편이 낫다. 그런 사람에게 책은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