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책을 읽는가?

by 강신철 posted Nov 1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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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경 써모임에서 끄적였던 글을 이제야 타이핑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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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읽는 목적은 계속 바뀌어 왔고 앞으로도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딱히 독서라고 할만큼 책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주로 만화책들이다. 이정문의 공상과학만화, 백산의 무협만화, 정애리의 순정만화... 이런 것들이 생각난다. 내가 살던 시골마을에는 소문난 만화수집광 서너명이 있었는데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내가 보유하고 있던 만화책이 가장 많을 때는 150권 가까이 되었다. 만화책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뿌듯한 물적 포만감도 있지만, 그 보다도 만화유통의 중심(HUB)으로 부각되어 새로 출판된 만화는 거의 내손을 거쳐가기 때문에 나는 항상 최신 만화의 출판동향을 저절로 파악하게 되고, 만화의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었다.


 

나는 만화를 밥먹는 일보다 즐겨했다. 내일 기말시험이 닥쳐도 새로운 만화가 입수되는 날은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완독을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만화에 빠졌었다. 만화도 책으로 친다면, 이 당시 내가 책을 읽은 목적은 흥미와 호기심이 우선이었고, 그렇게 많은 만화를 읽으려고 욕심을 부린 이유는 친구들 사이에서 만화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잘난체 하려고 책을 읽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에 독서라고 할만한 행위가 또 한 번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다리 수술을 하게 되어 학교 기숙사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서울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살던 기숙사였는데, 체육선생님과 국어선생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통학을 하지 않고 기숙사에 있으니 여유시간이 상당히 많이 생겼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빌려보기 시작했다. 이때 읽은 책들은 주로 괴테전집, 러시아문학전집, 일본문학전집, 미국문학전집 등 주로 세계문학 종류였다. 수업준비 이외에는 할 일이 없어서 열두권짜리 전집도 한 달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저절로 속독을 하게 되었다. 같은 방을 쓰던 선생님들도 내가 독서를 많이 한다고 칭찬을 했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이야기들을 하시는 바람에 독서광이라고 소문이 난 적도 있었다. 이때 내가 책을 읽은 목적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친구들에게 세계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는 재미도 있었다. 이때는 무협지도 엄청나게 읽었는데, 이는 내가 다리를 앓아서 자유롭게 운동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상상 속에서나마 경공술을 펼치고 장풍을 날리며 축지법을 쓰는 무협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의 독서편력은 침체기를 맞는다. 전자공학과를 다니면서 전자회로를 암기하고 세운상가에서 전자부품을 사다가 납땜질을 하며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로 라디오와 전축을 만드는 재미에 빠져 책을 멀리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교과서 이외에 내가 사서 본 책이라고는 [전자회로집]과 [과학동아] 등 주로 전공관련 서적이나 잡지였고, 이따금 통기타 반주를 위해 [가요대전집]이나 [팝송백과]와 같은 노래책 몇 권을 사볼 뿐이었다. 2학년 2학기가 가까워 오자 대학입시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입시지옥에 빠져야 했다. 안현필 저 [기초오력일체], [영어실력기초], [기초영문법], [영어 삼위일체], 송성문의 [성문종합영어], 김열함의 [영어의 왕도], 홍성대 [공통수학의 정석], [수학I,II의 정석]...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입시서적들 뿐이었다. 이때 책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고 가장 혐오스럽고 비참한 독서 시기였다.


 

독학을 하다시피 해서 겨우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로서는 인문계 과목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댓가로 공연한 지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학 초년에는 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이때는 주로 철학서적과 역사서적을 읽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명 철학자들의 책은 닥치는대로 읽었다. 칸트나 니체의 난해한 책들을 대할 때면 나의 독해력에 많은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이때 독서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 인생관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처음에는 지적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지만, 그제서야 독서의 참맛을 보게 되었다.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다시 독서침체기로 접어 들었고, 이로부터 근 이십여년간 나에게 독서라고 할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업을 해서 유학을 가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영어학원에 다녔고 유학중에는 전공공부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대학 교수가 되고 나서도 전공서적에서 한 발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십수년을 보냈다.


 

잃어버린 20년을 메우기 위한 나의 독서인생은 2002년6월 경영학과 현영석 교수님과 함께 100권독서클럽을 결성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는 책을 읽는 목적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취미생활도 아니요, 잘난체 하기 위함도 아니요, 먹고살기 위함도 아니요, 지적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함도 아니요, 생존을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비로서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책으로 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공과 상관없는 자연과학 서적이나 역사서, 인문철학 책들은 내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하루하루 깨달음을 얻는 재미를 선사했다. 공감능력이 향상되고, 삶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성격조차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세상을 관조하는 통찰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내게 독서는 매일 먹는 밥과 같은 일상이 되었고 항상 마시고 사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