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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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강기(博覽强記)란 글을 널리 읽고 기억을 잘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삼국지에서 원소가 박학다식한 조조를 두고 한 말이다. 박람강기하다고 해서 현실인식이 정확하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균형적인 시각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을 할 때도 자주 인용되는 사자성어이다.

 







공부름 많이 한 학자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에 하나가 엘리티즘이다. 엘리티즘은 인간의 가치를 지적 능력과 지식의 양으로만 재려고 하는 성향을 말한다. 소위 일류대를 나왔거나 학식을 많이 쌓은 사람은 자기보다 학력이 낮거나 지식이 일천한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도 한 때 소위 명문대를 나와 외국박사학위를 가졌다는 어줍지 않은 엘리티즘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참담함과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난 엘리티즘이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학식과 인품은 비례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인품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둘 다 지난한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고귀한 것들이다. 진정한 독서란 학식도 쌓고 인품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되는 책읽기를 말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학식을 쌓을수록 겸손해지고 관대해져야 한다. 이성의 칼날을 아무데서나 휘두르지 말고, 지식을 뽐내어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이며,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엘리티즘은 덜 익은 식자들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비(?)식자들에 의해 더 확대되고 옹호를 받고 있지는 않나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정작 지식인은 가만히 있는데, 어쩌다 조직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칠만한 권력을 가지거나 재력을 쥐게 된 비식자들이 거의 맹신적으로 엘리트들을 떠받드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신흥부자들이 그렇고, 대형교회 목사들이 그렇고,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그렇지 아니한가? 책을 읽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지 반성해 볼 일이다. 

 







나는 우리 독서애호가들이 천박한 엘리티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극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사회와 조직이 좌지우지되고 지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식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지식의 양에 의해 인간성이 평가되고 인간의 가치가 저울질 당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책을 읽고 사랑하되 책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나 석가가 책을 읽어서 성자가 되었는가? 현대 세계에서도 인도의 성자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자연을 텍스트로 삼아 인간지성의 최고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농사만 짓고 평생을 살아온 시골 촌부가 하버드대 박사보다도 인품이 더 뛰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만 자연을 텍스트로 삼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멀고 험난하기에, 조금이라도 편해 보려고 또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해 보려고 책이라고 하는 文明 수단을 발견하여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책을 읽는 우리는 박람강기함을 뽐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지식인이 되려면, 자기보다 지식이 모자란다고 해서 무지한 사람을 우습게 봐서도 안 되고, 엘리트로 인정받는 사람들끼리만 무리를 형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스스로 지식으로 인한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한편 자신의 학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지적 열등감에 사로 잡힐 필요가 없으며, 그저 책을 읽으면서 배우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마음으로 독서에 임해야 한다.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엘리티즘을 표방해서도 안 되고, 엘리티즘을 추종해서도 안 된다. 지식의 양과 인간의 가치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만약 박람강기할수록 오만해지고 고집스럽고 편벽해 진다면 그런 사람은 차라리 책을 안 읽는 편이 낫다. 그런 사람에게 책은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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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영 2009.01.22 03:45
    크게 공감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지식을 습득한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을 남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어떤 분야의 문외한은 전문가의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거나 노력해야만 한다라는 가정 그리고 전문가는 소수의 또 다른 전문가 동료들과 말이 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야만인의 오만이다. 이런 태도는 전문가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고 그의 지식을 진정한 학식이 아니라 장식적인 현학으로 변질 시킨다.'
    - 피터 드러커, '프로페셔널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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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종훈 2009.01.22 03:45
    오늘 올려주신 두 글은 저를 두고 쓰신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곡을 찔리는 느낌입니다. 매월 첫 날에, 새해 첫 날에 읽어야 할 글을 모아둔다면 제 다이어리에 꼭 넣어야 할 것 같네요. 제 마음도 1 mm 정도는 자란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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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영 2009.01.22 03:45
    균형독서뿐 아니라 사고의 균형, 가치의 균형, 시각의 균형까지 잡을 수 있도록 조언을 주시는 교수님같은 분이 백북스의 리더로 계신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익은 지성들이 널리 읽고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도 듭니다. 간혹 이런 용기있고 냉철하며 따뜻한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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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현 2009.01.22 03:45
    반성의 마음가짐을 갖게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교수님의 글을 동료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올바른 독서인의 길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선다면 정말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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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현 2009.01.22 03:45
    이혜영 회원님 긍정심리학 독후감보고 제가 크게 감탄했다는. 용기와 솔직함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이 저는 가장 잘 쓴 글이라 생각합니다. 이로써 제가 보기에는 혜영회원님 글이 훌륭한 것 같다는 말씀 전하고 갑니다.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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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영 2009.01.22 03:45
    ㅎㅎㅎ 두 분 댓글에 제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랬습니다.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
    세영님 말씀, 맞습니다. ^^
    저는 짧고 간결하게 말하고 들어주고 침묵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
    생각과 감정을 타인과 나누려는 적극적인 시도는 안해 버릇해 왔더군요.
    그러니 글을 좀 써 보겠다고 글이 잘 될리가요^^;;
    또 한 가지는, 저는 글과 말을 충분히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표현되어진 글과 말이 곧 그 사람이라는 데, 제 경험상 아닐 때도 많았거든요.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온 바와 같이 '읽고 쓰는 인간'과 '살아버리는 인간'으로
    거칠게 나눈다면 저는 '살아버리는 인간'을 택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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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영 2009.01.22 03:45
    이거 완전히 뒤통수 맞은 기분인데요. ^^ 경경모임에서 글이 안느는 것 같다고 화두를 꺼내시기에 어줍잖은 참조의 말을 드렸는데.. 사람과 글을 매치시키지 못했었나보네요. 쓰신글 읽어보니 색깔이 분명한 혜영님만의 스타일이 있으신데요. 정리를 아주 깔끔하게 잘하시네요. ^^ 이제야 혜영님께서 하신 고민의 속뜻이 뭔지 알것 같아요. 앞글은 지워야겠네요. ㅋㅋ 그리고 저는 왠지 언행일치하면 안철수님이 떠오르더군요. 말과 글이 그리고 행위가 일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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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윤경 2009.01.22 03:45
    한줄의 글, 한마디 말의 서슬도 경계해야 겠지만, 열정이 넘쳐 강압으로 흐르거나 다른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고 동조를 끌어내는 행동도 식자들이 범하기 쉬운 사례들인거 같습니다. 음... 김세영 회원님이 제 맘을 읽어버리신 것 같네요...
    "균형독서뿐 아니라 사고의 균형, 가치의 균형, 시각의 균형까지 잡을 수 있도록 조언을 주시는 교수님같은 분이 백북스의 리더로 계신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감합니다. 강위원장님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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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원 2009.01.22 03:45
    늘 여기 백북스에선 배우고만 가네요. 감사합니다. 이런 귀중한 말씀 보고 듣고 느끼고.
    많은걸 느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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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규 2009.01.22 03:45
    시기적절한 시사성이 있는 글이네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박람강기 아싸 사자성어 하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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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수 2009.01.22 03:45
    강교수님, 참으로 좋은 말씀을 진솔하게 전달하여 주심에 감사 합니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이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바탕으로 사물을 주도적으로 깨우치는 것은 권장할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두루 많은 학식을 지니신 소위 박람강기하신 분들, 특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분야 권위자 분들의 경우, 자칫 지나친 선민의식, 엘리트 의식 및 오만감에 사로잡힐 개연성이 많다고 인정합니다. 그들이 특히 겸손하지 못할 경우 흔히 회자되는 4자성어 표현인 견강부회, 독불장군, 곡학아세 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자신들에 대한 주변의 불신을 자초한 면이 많이 있었다고 공감합니다. 거듭 주옥같은 말씀과 진솔하신 고견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31일 대전 온지당 모임에서 다시 뵙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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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진 2009.01.22 03:45
    "마음의 눈을 가리는 근본은 지식에 있습니다. 지식이 발달되고 학문이 융성할수록 인간이 향상된다는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어디 선가 이 말을 보고 제 홈피에 옮겨 놓은 글귀입니다. 그 당시 이 말을 보고 참 부끄러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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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두 2009.01.22 03:45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글로 뭔가 남기면 항상 오금저린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내놓고 나면 반성이 되더군요.
    뭐든지 하고 나면 후회가 남습니다.
    그래도 하고 나면 반성이 되더군요.
    반성할 기회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지
    안 하고 깔끔하게 살려고 해야 하는지
    항상 두리번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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