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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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같은 패턴 안에 살아갑니다.


회사 규칙에 따라 하루 생활 패턴이 정해지지요.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같은 길로 출근을 하게 되겠지요. 저처럼 이요.




작년 여름 이직 후,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출근 시간에 합류하게 되었을 때


익숙하지 않은 출근 시간은 제게 곤혹이었습니다.


왕복 8차선 도로 위를 꽉 메운 차들, 양보 없는 운전자들. 꼬리에 꼬리 물기로 신호 기능이 무시된 무질서한 교차로.




도로를 꽉 메운 차안에 회사 출근규칙에 맞춰 도착해야하는 그들과 내가 있습니다.


불쾌한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또 나로 하여금 그들도 느끼고 있을 테지요.




출근길 무엇을 보고 지나가시나요?




초록불이 서둘러 뜨길 바라며 신호등만 보고 계신가요?


방어태세를 갖추고 내 앞으로 끼어드는 차가 없도록 살피고 계신가요?



요즘 EBS주파수에 채널을 맞추고 출발 전 영어학습을 다짐하지만 이내 예민해진 출근시민이 됩니다.


물론 볼멘소리 후에 아차 싶어 다시 라디오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지만 오늘도 도착 후에 기억에 남는 표현은 없네요. 


오랜 수행자도 힘들 것 같은 출근전쟁입니다.






그런 저에게 행운이 있었습니다.


세 달여 전에 알게 된 지름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택가와 천변 옆으로 난 1차선 도로로 적어도 신호 세 번은 피할 수 있는 길입니다.


5분 이상의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으니 출근시민 '올레~'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지름길은 저의 출근 명품코스임에 충분했습니다.


봄꽃들이 만개하여 일렬로 쭉 늘어선 모습은 딱딱한 회색 도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요.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택 옆으로 난 도로이기에 시속 40km 이하로 달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느린 바퀴의 움직임이 출근 시간에는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가 되네요.




명품코스를 지나치는 아침 제게 소소한 즐거움이 생겼습니다.


지름길 위에서 만난 한 명의 친구를 보는 일입니다.


각기 다른 24시간, 자신의 정해진 패턴 속에서 매일 아침이면 스칠 수밖에 없는 인연입니다.




늘 무표정한 얼굴과 책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 가방을 바닥에 닿을 듯 들고 가는 그 귀여운 초등학생이 제가 출근길에 늘 만나는 친구입니다.


그 아이의 등교시간과 저의 출근시간이 지름길 위에서 교묘하게 맞아 거의 매일 마주치게 되지요.


내가 차로 지나온 길은 그 아이가 걷고, 그 아이가 터벅터벅 걸어온 길은 제가 지나가게 되지요.


등굣길에 특별할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유독 그 아이만 기억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지름길 위를 걸어 등교하는 유일한 아이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3달 동안 지름길 위의 유일한 그 초등학생을 보게 되며 자연스럽게 관찰하게 되었어요.


재미있는 점은 늘 똑같은 무표정과 느릿한 발걸음입니다. 서두르는 법이 없네요.


늘 길의 오른쪽을 걷는 그 아이가 왼쪽 길을 걷는 횟수는 한손에 꼽을 정도 입니다.


비가 잦았던 올봄에는 우산을 방패삼아 걷고 있는 그 아이가 있고요. 어느 날은 우산 속에 어머니를 옆으로 꼭 안고 등교하는 그 아이가 보이네요. (그날도 무표정이었습니다.)




오늘도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반대편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네요.


근데 오늘은 귀에 이어폰을 꼽았어요.ㅎ 흰색에 핑크색이 들어간 상큼한 이어폰이네요. 




그 아이에겐 적어도 3~4년을 매일같이 걸어 등교한 길에 방해꾼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 어린 초등학생이 반갑습니다.


오늘 저도 모르게 차 안에서 ‘안녕~~^_____^’을 외치네요! ㅎ


물론 매일 보는 그 초등학생의 등교 모습이 저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지만 그 아이에게는 무관심의 대상이겠지요.




오늘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저의 출근길이 즐겁습니다. 즐거운 출근길이 될 수 있도록 해준 그 친구에게도 감사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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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준 2010.05.27 20:25
    붐비는 대로를 피해 은정님만의 출근길을 찾으셨다니.. 일상적이면서도 깊이 음미할만한 글 잘 읽었습니다. 밝은 글을 읽으니, 제 마음도 밝아집니다.^^

    저도 만년동에서 산내까지 출근하는 길이 매일 짜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은정님 차를 양보 안 해준 차가 행여 제 차가 아닐른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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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정구 2010.05.27 20:25
    임은정님이 말씀하신대로 시각적 감각이 탁월하시고, 글의 표현력도 훌륭하십니다. 마치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 시각적 이미지가 시(時)계열을 따라 살아서 움직입니다. 언젠가 그 어린 초등학생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내는 기적같은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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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은정 2010.05.27 20:25
    변정구 선생님,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합니다~ ^_________^
    선생님께서는 모든 학문을 통섭하시고 생활화 하시는 존경스러운 분이세요~
    모르는 분야가 없으시고 배움을 생활화하시는 그 열정,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그 귀여운 초등학생의 다른 표정을 보는 날, 꼭 알려드릴게요 ㅎㅎ

    전광준 총무님,
    생각해보니 복잡한 대로에서 총무님을 뵌듯 하네요. 물론 농담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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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현식 2010.05.27 20:25
    음~ 이런 느낌이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말 일지 모르겠군요~ ^^
    13년 만에 가장 맑은 하늘이었다는, 어제.. 오늘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상쾌하구요.

    지금은 대구 회사 기숙사라, 30분 전까지 푹자는 것이 요즘의 낙이지만,
    서울 근무 때.. 러쉬아워 지하철 or 동부간선도로의 치열함은 가끔 생각납니다. ㅋㅋ
    그립기까지 할 때가 종종 있네요.

    ~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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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석연 2010.05.27 20:25
    웃음을 머금고 읽어가면서 저와 제 아들의 출근길, 등교길을 떠올립니다.
    혹, 누군가 은정님처럼 우리를 마추져 스쳐지나갈 수는 없는 도시의 인도길이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지나치는 아이들과 엄마, 아빠들이 있네요.
    자꾸 보면서 익숙해져서 인사하기는 뭐하고, 안하자니 더 뭣한 사이들이 되어가고 있어요.

    교문 앞에서 교통정리하면서 늘 인사해 주시는 녹색 어머니들(초록 어머니들이라고도 ^^)과의 인사는 그나마 좀 자연스러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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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은경 2010.05.27 20:25
    은정님의 아침 출근길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저는 얼마 전 집을 나서는 시간을 30분 앞당긴 후부터 출근길에 보이는 나날이 짙어지는 산을 보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출근하고 있답니다.
    매일 무표정한 아이에게 언젠가 인사 한번 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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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은정 2010.05.27 20:25
    저의 소소한 즐거움은 이곳 백북스에 와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공유하니 댓글을 통해 여러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네요.~^__^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 이 책 소중히 읽어보겠습니다.
    그간 며칠 맘고생한 것을 밝히자면 연탄이정원님께서 선물로 주시셨던 책을 잃어버린 후 찾은 일 입니다. 죄송스러워 말씀을 못 드렸어요. 하지만 저와 어떤 강한 이끌림이었는지 결국 많은 분들의 수고스러운 손을 거쳐 제게 다시 왔답니다. ^^

    연탄이정원님께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를 전해 받으며 감사히 받았던 기억과 조장희 박사님 강연회날 저의 불찰로 ETRI에 놓고온 그 책을 이정원총무님께서 어렵게 찾아주신 일을 엮으니 지구상에 없는 아주 강력한 자기장의 힘이 아니였나 합니다..
    그 자기장의 힘은 순수한 마음을 담은 사람들이겠죠. 생각하면 다시금 가슴이 따뜻해지네요~

    맘 편히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되었습니다. 정독 후 변정구 선생님의 '패턴' 에세이 기대하겠습니다~
    ^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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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영 2010.05.27 20:25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제가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날이 언제일까 생각했는데
    은정님의 글을 읽으면서 감사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네요.
    몸이 힘들어지면서 마음도 여유를 잃었는데 여유를 회복해서 몸에 힘을 넣어보렵니다.
    백북스 처음 가입했는데 좋은 글로 힘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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