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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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프랑스 보르도 와인과 면도날 같은 피아노 C음 
                                                                조정권 시인

                                                                       

 밤이 파란 면도날 하나를 내게로 날린다.

누가 모차르트를 치고 있다.

비 내리는 뜨락으로 파묻히는 피아노.

저물녘 돌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바늘

접시위에 떨구는 바늘소리

검은 튤립처럼 펼쳐진 악보,

등 뒤에서 누가 모차르트를 동생 안아주듯 치고 있다.

하늘을 향해 검은 꽃송이를 봉인하듯

미모사나무 죽은 아랫도리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비.

눈물이 아직도 따뜻하다.

音들이 철조망의 거위들처럼 모가지를 늘어뜨린 채 거꾸로 메달려있다.

거위들은 죽어서도 모가지를 껴안고 있다. 눈물이 체온처럼 남아있다.

누가 오선지에 탐스런 포도송이들을 걸어놓고 있다.

미모사 꽃향기 환한 창가에서

밤이 면도날 하나를 내 귓가로 또 날린다.

내겐 구석의 슬픔이 더 따뜻하다.

-누님같이 잠깐 다녀간 저녁비의 이미지



이 시는 프랑스 남쪽 해안에 머물며 쓴 시다.

보르도 시에 머무는 동안 매일 비가 왔다. 밤이 누님 같았다.



보르도는 파리보다 한 달 먼저 꽃이 핀다. 대서양에 가까운 관계로 노란 미모자와 새빨간 따마리스가 꽃샘추위에 멈칫하고 있다가 마중 나오듯 수없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광활한 포도밭은 긴 겨울의 숙취에서 깨어난 듯 흙에서 와인 향을 게워내고 있다. 이곳에 와서야 지평선을 볼 수 있었다. 물새들이 날아오는 것으로 보아 바다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른 봄 포도나무 밑에 흙을 깨우기 위해 샴페인을 붓는다. 몽떼뉴, 몽떼스키, 모리악이 여기서 태어나 자랐고 장 꼭도, 고야, 살바돌 달리가 보르도 남서쪽 휴양림 아르카숑에서 여름을 보냈다.

2005년 3월 중순 나는 한불수교 120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보르도 시에서 열린 ‘한국시축제’에 고은, 신경림, 황지우시인과 함께 참가했다. 행사도 행사지만 이번 여행의 개인적 관심사는 횔덜린이 정신착란을 일으키기 바로 직전 가정교사로 지냈다는 보르도의 쪽방을 탐문하는 일이었다. 운 좋게 나는 행사장에서 만난 보르도 시인 장 폴 미쉘(보르도3대 철학과교수)의 안내로 그 집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스쳐 지나간듯한 횔덜린의 행적이란 밤하늘에 살별이 지나치듯 세 달에 불과할 뿐이다.

횔덜린은 1801년 12월 보르도 주재 함부르크 총영사 마이어가(家)에서 가정교사로 취직하기 위해 스투트가르트를 떠나 눈 덮인 오베르뉴 고원을 거쳐 도보로 보르도에 도착(1802년 1월 28일)한 것으로 나와 있다.

가정교사직 한자리를 얻기 위해 근 두 달 눈 덮인 고원과 폭풍과 들짐승 떼와 밤을 지새우며 얼음같이 추운 잠자리를 견디며 걸어서 간 보르도행. 낡은 신학생 복을 입고 행장을 꾸린 그는 스투트가르트에서 도보로 출발해 독일 켈 지방과 슈바르츠발트 흑림지대와 프랑스 중부 산악지대 오베르뉴를 거쳐 알자스주 스트라스부르(파리 동쪽 447km)에 12월 15일 도착한다. 파리를 거치지 않고 리용을 통과해 보르도로 간다는 조건으로 비로소 입국허가를 받은 것은 12월 30일. 살을 에는 숲속에서 혼자 1802년 새해를 맞은 이 국외자는 리용에서 600km 떨어진 보르도를 향해 걷고 또 걸어 1월 28일에야 도착한다.

오늘날 생각해도 이런 도보여행은 아무도 꿈꾸지 않는다. 미친 짓이리라.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 생각하고 그 길을 간다.

삶이 아름다운 건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더욱 빛나는 것은 아무런 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여행의 모습은 운명의 모습을 띤다. 횔덜린은 세 달을 견디지 못하고 불현듯 귀향을 서두른다. 뚜렷한 이유가 없다. 정신착란이란 징후와 함께 그는 돌아온 것이다.

삶이라는 책 속에는 ‘이유 없는 이유’가 있기도 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보르도에서의 시인의 행적을 되찾아볼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책갈피 속에 끼워놓은 빨간 따마리스 꽃잎처럼 그의 이곳에서의 삶은 말없음일 뿐이다. 그 말없음은 내리는 빗발의 정적이 안내해주는 소리의 오솔길과 같다. 여행자는 그 오솔길에 머물다 오면 족한 것이리라.

출처: 몇 년전 매일경제신문 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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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석희 2012.10.22 01:08
    세상은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건(사실)의 총체. - 비트겐쉬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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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남수 2012.10.22 01:08
    "내겐 구석의 슬픔이 더 따뜻하다."

    쌀쌀해진 가을날 담모퉁이에 붙어서 볕바라기라도 하고싶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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