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혹은 논쟁)의 기술

by 미선 posted Aug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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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혹은 논쟁)의
기술



우리나라는 토론 문화가 잘 발달치 않아서인지 학문적
논쟁에 있어서도 매우 미숙함을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학문이 발달한 나라들을 보면 토론과 논쟁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을 만큼
많이 발달되어 있고 열려 있다..

특히 한국은 <논리적 차원>과 <인격적 차원>을 잘 구분하지
못하여, 상대방에 대한 논리적 공격을 일종의 인격적 침해로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종종 감정 싸움으로까지 번져나가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로 공식적으로는 조심해하며 몸을 사리는 경향도 없잖아 있다. 



물론 동양사회에서는 인지상정의 관행들이 더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서로의 입장과 견해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웬만해서는 서로에 대해 논쟁적 토론을 잘 안하려 들거나 아니면 그냥 회피 또는 뒤에
숨은 채로 곧잘 무시하는 편이 많다..

그러나 서구 사회의 대학이나 학문이 발달한 나라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토론 문화가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점에서 <논리적
차원>과 <인격적 차원>은 될수록 구분되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 나라의 토론 논쟁들은 매우 자연스러운만큼이나 열기있고
활발하다.. 심지어 가까운 동료 교사나 스승과 제자 사이라도 토론 논쟁은 매우 치열하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곤 하지 않는다. 물론 서구 학계라 해서 감정 싸움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동양사회보다는 그러하다는 얘기다. ((참고로 교양 베스트셀러였던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김영사)를 읽어보면 학문적 논쟁에 대한 동서양 사회의 성향적 차이도 잘 비교해놓고 있다..이는 얼마전 EBS 다큐 '공부하는 인간'에서도 나온 걸로 안다.))

일단 임의의 A와 B라는 사람이 서로의 입장
차이로 토론을 할 경우
, 그것이 참으로 <성숙한 논쟁>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로가
전제되어야 할 4 가지 사항의 범주
가 있다..

1.
A만 알고 B가 모르는 영역
2. B만 알고 A가 모르는 영역
3. A도 B도 둘 다 아는 영역
4. A도 B도 둘 다 모르는
영역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4가지 창은 나 자신이 기라성 같은 세계적인 석학과 토론을 하든, 하다못해 아주 나이가 어린 초딩이랑 대화를 하든, 그 누구와 얘기하든 간에 언제든지 필연적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는
사태다.
단지 확률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끔 나 자신 역시 "세계적인 학자"로 불리는 사람들도 너무나 구멍뚫린 허술한 얘기들을 하는 걸 보고선 매우 우습게 볼 때도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우리는 모두가 스승이요 모두가 학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 대학의 수업을 들여다보면 선생과 학생도 공정한 토론의 선상에서 사안을 놓고 함께 머리를 맞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토론 논쟁을 할 때 괜시리 "건방지다"
"아는 체 한다" 등등 이런 식의 감정적 언급들은 기본적으로 논쟁에서의 주된 포인트가 결코 될 수 없다고 하겠다.. 오히려 그러한
말들은 논쟁의 핵심적 핀트를 흐리기만 할 뿐이다.. 

만약 위의 4가지 사항을 말한 그림이 서로 간에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성숙한 논쟁을 위한 기본적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고 봐도 좋겠다.. 저것은 토론 논쟁 이전에 대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 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토론 논쟁의 그 시작점을 말해보자.. 우선 토론 논쟁의 시작점은 가능한 3번 차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즉,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러한 공유점에서부터 논쟁을
시작하면서 
서로 간의 각자의 주장들을 펴는 것이다.. 이 공유점이 넓게 많을수록 그 토론 논쟁은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이 때 나만 알고 상대가 모르는 영역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논지의 선후 맥락을 먼저 소개한 후 그것이 결국 상대에 대한 반론의 성격일 경우엔 필연적으로 <정합적인 근거>를 들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
바람직
하다..

아무런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그냥 그 자신만 아는 영역을 가지고 새로운
주장인양 제시하는 것은 결코 상대방에게 설득적 자세로 다가서는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 그것은 <비판>이라기보다
<비난>이며, 일종의 사유의 폭력이요 횡포일 수 있겠다..

반면에 상대방을
비판함에 있어 그 <근거>를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바나 혹은 상대방이 명백하게 언급한 바를 그대로 드러내보여주면서 이를 상대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삼을
때, 
그것은 상대방의 허를 매우 강력하게 찌르는 설득적 비판이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A와 B 모두가 몰랐던
것을 서로 알게 되는 
즉, 4번 차원에 이를 때에 그 토론은 양자 모두에게 생산적인 논쟁과 토론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서로 간의 대화 자체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논쟁의
가장 좋은 사례는 이미 우리네 전통 안에도 있다.. 익히 잘 아는 조선의 이황과 고봉의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 그러했다.. 이들의
논쟁이 서로에게 혹은 한국전통사상사 전체에서도 볼 때도 얼마나 커다란 유익함을 줬었는지는 지금까지조차 학계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이잖은가..

물론 토론 논쟁이 과다할 경우 싸움이 날 경우도 있다.. 학문의 지성사에서 칼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서로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그 지점에서 서로의 학문적 차이와 핵심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입장들 간의 충돌은 <재난>이 아니라 <기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서 오늘날 둘을 인격적 차원으로 매도하거나 그러진
않는다.. 단지 학문적 열의가 과잉했다고 볼 뿐이지 이를 두고서 오늘날 평가하기를, 포퍼는 참으로 버릇없는 놈이고 비트겐슈타인은
성질 고약한 파시스트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토론(논쟁)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해두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그것은 영원한 평행선이나 독단의 망조로 나가기 쉽상일 뿐
이다.. 그렇기에
<자기부정>까지도 받아들일 줄 알면서 끊임없이 자기검증을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구하려는 진정한 자세가
아닐는지.. 그럼으로써 점점 더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비판에도 단련되어 있는 굳건한 진리를 향해 점근선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오류와 반성이야말로 그 자신을 성장시키는 가장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나 자신조차도 오류가 날 수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종말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
(MT 16)라고..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 자신들은 모두가 진정 열려 있는 사람인가..
물론 나 자신도 부족하기에 이는 어디까지나 함께 권하고 싶은 얘기라는 점도 첨언해두고자 한다. 



[감정과 이성 및 대화와 토론의 구분] 참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