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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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이네를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조정권 시인

“이것은 서막일 뿐이다.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불태운다.”(하인리히 하이네, 1820)




하인리히 하이네. 우리에게는 사랑시나 연애시를 써온 시인으로 알려진 시인. 번역자들이 하이네 사랑시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소개한 탓이 크지만 사실 그는 혁명가였다.

독일시인으로서, 괴테를 제외하고 독일 바깥에서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만큼 독특하게 인정을 받았던 시인은 없다. 세계2차 대전이 끝난 후 그의 명성은 괴테와 동등한 수준까지 격상되었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뒤셀도르프 대학은 1988년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으로 교명이 바뀐다. 명예가 회복되는 데 100년이 더 걸린 셈이다.




1992년 내가 서독 본대학 한국학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본대학 구기성박사로부터 내가 묵고 있는 베토벤하우스호텔 뒤 동산에 하이네 시비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 대학교 앞 수 만 평방미터의 널찍한 공원과 라인강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언덕길을 조금 내려가다 보면 외따로 서 있는 현대조각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아주 심풀하다. 높이 2미터쯤 되어 보이는 자연석을 가로 세로로 단순히 얹어놓은 조각물인데 겉으로 보아서는 이것이 시비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시비 뒤쪽으로 돌아가면 중앙 검은 철판 상단에 아주 조그맣게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하이네 시비이다. 시비라기보다는 너무 간소하다. 앞뒤를 둘러보아도 하이네 시 구절이나 시인의 이력이나 시가 담긴 단 한 줄도 새겨져 있지 않다. 대표시와 시인의 이력을 대문짝만하게 새겨놓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비와는 대조적이다. 모든 군더더기와 치장을 삭제하고 ‘하이네’라는 이름 석 자만 새겨놓은 그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본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인 뒤셀도르프 출신의 하이네가 본과 인연을 맺은 것은 본 대학교 입학해 중세문학 운율학 두 학기를 수강한 것뿐이라고 한다. 자존심 강하고 낭만적인 이 시인은 일생 세 번 권총결투를 하는데 본 대학을 자퇴한 1920년에 한번, 1922년 베를린대학에서 또 한번, 1941년 파리에서 또 한번 결투를 벌여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고 전한다. 나는 하이네 시비가 서 있는 이 언덕 어딘가에 권총결투를 벌이던 곳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억측도 해 보았다. 본 시민들의 하이네 추억은 시인이 자기 고장의 대학을 다녔다는 자부심을 드러내지 않고 뽐내듯 라인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기념비로 서 있다.

단 두 줄

                                   조 정  권

독일 본에 도착한 첫날

본 대학 한국학연구소

부비에 서점에 들려 시집 한권 구하고.

밤에는 이국시인들과 라인 강이 내다보이는

호텔 베토벤하우스에서 삶에 가득 넘치는 뢰벤 브로이

시간의 거품을 높이 들어올리고

새벽 새소리에 깨어

잠 든 대학건물 앞 공원 산책로를 걸어

언덕위로 한참을 올라간다.

초겨울인데도 파랗게 솟은 잔디에 수없이 맺힌

이슬 만져보며

그 광활한 푸름 속에서 그러나 홀로 무성한

이슬들의 生沒,

시든 채 커 갔던 보랏빛 풀꽃들의 生沒을 생각하며

시든 채 살다간 시인의 生沒 사이를 오가다 마음 갇힌 채

한없이 남겨질 날을 생각해 보았다.

네게도 그런 날들이 있을 것이다.

안개는 언덕을 지우고 무덤을 지우며 무덤 한 채를 또 지울 것이다.

언덕위에는 세상으로부터 감금된 채 지워졌던 시인이

누워 있다.

나는 세 개의 거대한 화강암덩어리를 자연스럽게 잘라

ㄷ字形으로 엮어 일으켜 세워놓은 거대한 시비 앞으로

다가간다.

거친 화강암 표면에는 아무런 꽃장식이나 수식도 없이

시 한 줄커녕, 다만

조그맣게 새겨놓은

글씨만 보였다.

하인리히 하이네

1779-1856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

간명하게, 단 두 줄.



‘단 두 줄’로 요약되는 명료한 삶의 동공, 그 눈동자.




내가 놀란 것은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비에 새겨있는 그 거창한 연보에는 동공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이네 시비엔 하이네 눈동자가 있다.



본 시민들의 대단한 자긍심이랄까?



누가 하이네 이력에 대해 이타저타 궁금해 할 것인가. 세계가 다 아는데.



구차한 수식이 필요 없다는 것. 뒤쉘도르프 출신이지만 자기네 마을의 본대학을 잠깐(중퇴) 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 본 시민들은 하이네를 자기 고향사람으로 여긴다.


** 조정권 시인께서  학기말 종강강의 내용을 새벽에 보내주셔서
   앞 부분을 공유합니다. 지난해 가을 계족산에서 강연하신
   <산정묘지>의 시인. <고요로의 초대> 에서는 "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 . . . (은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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