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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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독서 공동체란 슬로건은 요즘 내 최대 관심사다. 중학교 3학년 때 ‘사람과 컴퓨터’라는 컴퓨터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이찬진 씨가 만든 ‘한글과 컴퓨터’사를 빗대어 작명). 구형 도트 프린터로 인쇄해 그럴싸한 회원증까지 발부해 구색을 갖췄다. 동네 컴퓨터 학원 빈 강의실을 빌려 컴퓨터 조립, 워드프로세서, PC통신 사용법 등을 학습했다.


 


중학생이 이끄는 모임치고 제법 활동이 활발했는지 학원에 다니던 대학생 형까지 회원으로 가입했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교 5~6학년 회원도 몇몇 있었으니, 당시 PC 보급률이 높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PC 마니아들만 모인 학습 조직이었다. 회원끼리 PC 관련 책을 돌려 보며 한글1.1버전으로 문서를 만들어 공유하는 방식으로 학습을 진행했다. 스터디를 마치고 학원 건물 1층에 있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1인당 족히 100그릇은 먹었을 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장면 그릇수와 모임의 종착역이 비슷해 아쉬운 추억이 됐다.


 


방안에 앉아 원인을 분석해 봤다. 자장면 100그릇을 해치울 만큼 결속력이 좋았던 모임이 갑자기 분해된 이유가 뭘까? 그때 창문 밖으로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앞집 사는 대학생 형이 안테나 같은 걸 빌라 옥상에서 설치하고 있었다. 곧바로 뛰어 올라가 그 실체를 확인했다. 아마추어 무선 ‘HAM(햄)’이었다. 조그마한 간첩용 수신기(?)의 전원을 켜고 주파수를 맞추자 여기저기서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콜싸인 신호를 보냈다. 영화 콘택트에서 조디 포스터가 외계신호음을 듣고 느낀 희열이라면 당시 느낌을 대신할 수 있을 거다.



연결이 만드는 우정의 네트워크


나는 모임의 실패 원인을 연결성 부족으로 결론졌다. 그날 이후 충남대에 다니던 앞집 형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형네 집은 층수가 낮아 안테나를 세우기에 부적합해 3층 옥상이 있던 우리 집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케이블로 우리 집과 형네 집 사이를 연결했다. PC통신을 하긴 했지만 무선이 주는 소통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다. 당시 형은 8비트 구형 컴퓨터를 사용했던 반면 나는 286 컴퓨터를 썼다. 내가 형의 무선장비에 놀랬듯이 형도 내 신형 컴퓨터에 관심을 보였다(당시 8비트로 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비싼 통신료를 내가며 외국 사이트에서 햄과 PC관련 자료들을 열심히 다운로드했다. 서로 장비를 공유해 사용할 만큼 친해지자, 중학생 이던 나를 충남대 햄(HAM) 동아리 회원들에게 소개해 줬다. 자신을 철저히 오픈하고 서로의 지식을 나누니 우정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연결 노드는 빠르게 확장됐다. 학원 강의실에 모여 PC 얘기만 나눴던 방식이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컴퓨터 모임엔 내부결속만 존재할 뿐 연결성이 없었다.


 


연결이 가져온 또 다른 세상


PC통신을 몇 번 했지만 소극적으로 접근했다. 통신비가 문제였다. 지금처럼 전용선으로 접속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선전화 케이블에 모뎀을 연결해 통신하던 시절이라 통신비 장벽이 높았다. 공부의 연장선(?)이라고 어렵게 설득해 본격적으로 통신을 시작 했다. 연말에 한국통신에서 보내는 감사편지로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투자비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가입자 수가 2만 명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보니 지금과 달리 통신상에서의 관계가 정감 있고 진솔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PC통신 모임에 참석했다. 부산이나 서울지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등교 시 가방에 사복을 챙겨왔다(지금도 서울에서 독서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비슷한 상황을 연출한다). 1년여를 공들인 끝에 전국적인 연결망을 갖게 됐다(이때 만난 인연들은 지금도 연락한다). 이를 바탕으로 컴퓨터 모임에 대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컴퓨터 서클을 만들었다.


 


역시 회원증을 발부하고 방과 후에 모임을 갖았다. 예전 모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국 모임이나 PC 통신에서 벌어지는 사건, 자료들을 중심으로 스터디를 진행했다. 주말에 모임에 참석하고 친구들에게 통신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려주는 일이 정말 신났다. 학습 영역도 PC 조립에서 프로그래밍으로 진화했다. 멤버 전원이 학교대표로 프로그래밍 경진대회에 나가기도 했다(당시 함께 했던 5명의 친구들은 모두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


 


전국적인 모임을 갖다보니 중간지점인 대전에서 모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우리 집은 PC통신 회원들의 숙소로 쓰였다. 고등학생인 나보다 몇 살이나 많은 대학생들과 사회인들이 집에 찾아오니 부모님도 노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많을 땐 10명 넘는 회원들이 자고 갔다. 비교적 손이 덜 드는 비빔밥을 분주히 내 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경북 상주가 고향이신 어머니는 대구나 부산에서 오는 회원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셨다.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이유도 한 가지였다. 연결성을 갖기 가장 좋은 곳이 서울이라고 판단했고, 나와 연결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네트워크가 가능해도 대전이라는 지역성이 주는 여려 한계를 느꼈다. 엄청난(?) 활동으로 13등급까지 내려간 내신등급을 시작으로 마지막 1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수능을 준비했다.


 


학습독서로 꿈꾸는 세상


15년의 시차를 두고 내가 결성한 두 모임을 떠올리며 희비가 엇갈린다. 오픈도 했다. 결속력도 있었다. 연결성도 있었지만 지속되진 못했다. 몇 년간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독서클럽에 참여하며 두 모임에 대한 생각이 불연 듯 떠오를 때가 많았다. 6년간 지속된 모임, 독서라는 공감 가는 주제! 무엇보다 실로 많은 이들과 소통을 했다. 하지만 과연 지속가능한 모임으로 성장할 지에 대한 논의들이 수면위로 나오지 못했었다.


 


단지 독서를 좋아한다고 해서 서울-대전을 오가면서까지 책을 읽어야 할 합당한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서울에도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는 주변의 발언도 한몫 했다. 내가 만든 두 모임과 지난 6년간의 독서클럽은 왜 달라진 게 없는 것일까? 최근 가시화된 학습독서 공동체라는 방향성이 15년 전 부터 이어오던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름대로 개방성과 연결성은 갖췄지만 평생학습이란 개념이 빠졌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나 친목모임을 만들 순 있다. 그 속에 약간 명 학습을 첨가해 지적유희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조루증에 걸리기 쉽다. 돌이켜보면 ‘약간’, ‘대충’, ‘적당히’라는 단어들과 타협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곳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독서를 지향한다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인간이 진화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 학습이라는 것을 간과하며 살아온 것 같다.


 


15년 전보다 네트워크 환경은 수백 배 증가했다.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독서클럽의 활동상황을 모니터링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대전으로 향하게 된다. 아니 이제 그 학습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다시 대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본능이 들 정도다!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답을 대전! 100권 독서클럽에서 찾았다. 공부꾼들로 넘쳐나는 독서클럽의 내일을 꿈꿔본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7-11-28 01:31:27 회원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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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영석 2007.11.10 13:11
    독서학습공동체로 발전하기위한 열정이 넘쳐나는 좋은 글입니다. 성공한 사람, 조직의 특징은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는 독서학습공동체"= 100권독서크럽. 열정 (enthusiasm) 은 인간이 이 우주에 던져진 존재(Gewoerfenheit) 로서 신에게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로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선 세상만사에 자기가 의미를 부여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 열정의 출발입니다. "저 사람은 왜 그렇게 열심이 한데, 그 일이 그렇게 재미가 있을까 ? 미쳤나 봐 ?"
  • profile
    김홍섭 2007.11.10 13:11
    정말 가슴뛰고 설레이는 글 입니다.^^ 지난날 저의 삶을 되돌아 봤습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한게 없더군요. 이제는 이 클럽을 통해 저의 길을 찾아 갈수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전에 문경수 회원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00권 독서클럽 모임이 제주도에서 한다해도 참석할 수 있다"라구요. 저도 그렇습니다.
  • ?
    박문호 2007.11.10 13:11
    대학시절 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이군요.
    잘 정리된 글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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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2007.11.10 13:11
    그 열정의 원천이 무엇인가 했더니 어렸을 때부터 키워왔던 것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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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중 2007.11.10 13:11
    ^^...저는 혼자서 즐기는 미술활동, 책 읽기, 공상하기, 아이들과 놀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다지 열정적이지 못한지라, 독서학습공동체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열정을 읽고 있노라면.....제가 과연 함께 할 수 있는 곳일까....하는 두려움(?)이....^^ 저는 이 곳에서 회원님들의 그 열정, 조금씩 조금씩 훔쳐보면서 연습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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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수 2007.11.10 13:11
    글이 참 침착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문경수회원을 어렸을 적부터 봐온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 한가지는 정말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는 스타일~!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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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경화 2007.11.10 13:11
    이인성의 소설 중에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이 있습니다. 제가 그래요. 미칠줄 아는 문경수님과 같은 분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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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윤호 2007.11.10 13:11
    저도 어린시절 하이텔에서 큰 모임의 시삽을 맡은 적이 있지요. 예전 피씨통신 시절의 추어고 덤으로 얻고, 우리클럽의 영속을 위한 열쇠가 무엇인지도 함께 느끼고 있음에 참으로 즐거운 아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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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석희 2007.11.10 13:11
    아....
    저 또한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문제였는데...
    제가 알고 있는 한 동아리(로켓연구회), 그 생명력이 20년이 넘는데... 끊어지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신입회원들의 호기심때문이요,더 이상 질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학습"의 결여이군요...
    문경수 회원님, 감사합니다.
    마치 지적 받은 느낌이예요. 제가 속해있던 동아리에 보다 강도 높은 학습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후배들과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
  • ?
    조동환 2007.11.10 13:11
    "100권 독서클럽 모임이 제주도에서 한다해도 참석할 수 있다" 저도 언젠가 들었습니다.
    이 열정에 상당히 놀랐었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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