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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4 11:07

세상 참 좋아졌어!

조회 수 3406 추천 수 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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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TV에게 붙여진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이름이다. 아니, 얼마나 훌륭한 기술의 집약체(?)인데 '바보'라는 명칭이 떡하니 붙는다는 말인가. 물론 TV가 제공하는 컨텐츠가 바보스러워서라기보단, 그 앞에 넋을 놓고 앉아서 뇌를 수 시간 동안 비우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바보화되는 것을 빗대서 붙은 별명이겠지만 말이다.

 

  세월이 지나, 놀라운 기술의 발전 덕에 '바보상자'는 그 부피가 현격히 줄어들어 벽에 걸 수도 있는 '바보액자'화 하였다.  게다가 요즘 TV는 화질도 어쩌면 실물보다 더 실물스러운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에 잡힐 듯한 현장감을 고스란히 살려 내 준다. 이쯤 되자 평소 TV를 즐겨 보지 않았고, 웬만한 화질 차이는 봐도 모를 정도로 무심했던 나에게조차 TV가 무척 매력적인 매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 자연 다큐멘터리나 세계 기행과 같은 프로그램을 접할 때면 그 선명한 화질이 주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는 수고 없이도, 30분 남짓의 입수 시간에 쫓기고 이런저런 안전수칙에 신경쓰며 직접 스쿠버다이빙을 하지 않고서도 쇼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여기 좋네, 저기 예쁘네 하면서 우아하게 지구 여기저기에 대한 지식들을 받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나오는 TV들은 영화관 비율의 와이드 화면이니, 직접 보는 것보다는 시야가 좁긴 해도 아쉬운 대로 '널찍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아, 21세기 인간의 삶을 최고로 풍족하게 해 주는 문명의 이기란 역시 이 TV가 아닐까? 하는 살짝 과장된 감동으로까지 번져 버리는 건, 평소 사소한 것에 너무 감동을 잘 하는 나의 특성이 반영된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직접 몸을 움직여서 익히는 것을 귀찮아하고, 무거운 엉덩이로 웬만한 주변사들을 해결하는 것이 몸에 익은 현대의 도시인들에게는 여가'선용'을 위한 수단이 이 TV만한 게 없다. '손가락 까딱'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노동력만으로도 놀라운 양의 보고 들을 거리가 제공된다. 영양가 없는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들도 나름대로 '지친 뇌를 식히기 위한 수단'이라고 강변할 수 있는 데에다, 찾아 보면 의외로 유익한 프로그램도 꽤 있다. 책을 읽어라, 읽어라 한다지만 책은 활자 정보만을 제공하는 데 비해 TV는 빈번히 제공되는 자막이라는 활자 이외에도 시각+청각 정보까지 동시에 제공해 준다. 이렇게 되면 TV의 압승! 현대인은 충분히 지쳐 있다. 휴식 시간에까지 골아프게 사고를 요구하는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TV만 열심히 끼고 앉아 있어도 일상적인 사교 생활을 유지할 수준의 화젯거리는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 TV를 보지 말아라, 라고 하는 말이 점점 설득력을 잃어 갈 만한 세상이 되고 있달까.

 

  다양한 컨텐츠 중에서도, 우리 모녀는 특히 해외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을 즐긴다. 오늘도 KBS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프로그램을 연달아 보았다(하나TV와 같은 서비스가 생겨서 좋아하는 컨텐츠만 모아서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신기한 발전이다). 한 시간 간격으로 마다가스카르, 하와이, 알래스카... 직접 갔더라면 일 년에 한 군데씩 가 보기도 힘들 곳들을 앉아서 수 시간만에 다 접수해 버린다. 어머니께선 말씀하신다. "이러니 힘들게 여행 다닐 필요가 없어. 패키지 여행 쫓아가면 이렇게 구석구석 다 볼 수 있는 줄 아니. PD들이 좋은 구경거리만 다 모아서 보여 주니 얼마나 편하고 좋아."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화면에 그토록 가 보고 싶어하던 마다가스카르 섬이 소개된다. 내가 상상해 왔던 것처럼, 마냥 야생동물들이 뛰노는 동물의 왕국은 아니다. 에이, 거의 무인도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나의 빈약한 정보가 틀렸던 것일까, 혹은 그 섬 어디엔가에는 내 상상과 같은 그런 곳이 있긴 한 걸까. 알 수는 없지만, 내 머릿속의 '마다가스카르'는 실망과 함께 리셋된다. 간간이 화면에 얼굴을 보이는 담당PD의 진행 경로와 비음이 섞인 특유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나레이션이, 그간 내가 상상으로 쌓아 올렸던 마다가스카르의 환상을 싹 밀어 내고 대신 자리를 잡았다.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차라리 보지 말 걸 그랬나? 훗날 내가 그 곳을 혹시라도 찾게 된다면, 나는 그 곳의 감동을 피부에 스미듯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 그 때 화면에서 봤던 거랑 똑같네' 하는 식으로, 무미건조한 사실 확인 절차에 그치고 말까. 마치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만났을 때처럼.

 

  물론, 마다가스카르 섬이나 알래스카와 같은 곳에 평생에 한 번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현실에, TV로나마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 훌륭한 차선책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저렇게 햇살이 내리쬐고 땅이 갈라졌는데도' 전혀 그 후덥지근함이 느껴지지 않는데, 매끈한 화면에선 흙벽돌의 까끌함이 만져지지 않는데 어떻게 그 현장감과 벅찬 감동을 제대로 전달받을 수 있겠는가? 현대인들은 이 간접 경험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지나친 편리함의 추구는 독이 된다는 사실조차 이미 잊어버린 듯하다. 마트에서도, 씻고 다듬은 야채는 흙 묻은 거친 야채보다 비싼 값에 팔린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야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밭에서 직접 손에 흙 묻혀 가며 손수 뽑은 야채가 주는 그 원초적인 생명력, 그 감동의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느끼려고는 할까.

 

  세상은 참 좋아지고 있다. 내가 보기엔 더 이상 좋아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은 나오고 또 나온다. 하지만 사탕수수를 정제한 흑설탕을 더 정제해서 백설탕으로, 그것도 모자라 더 정제한 아스파탐으로.. 새로운 정제 기술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감탄했고, 새로운 것을 좇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니 오히려 '정제될수록 더 나쁘다'며 예전의 거친 흑설탕을 다시들 찾고 있지 않은가. TV에서 보여 주는 것들도 결국, 정제된 지식에 불과하다. 완전히 끊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조금씩 '거친 지식'을 받아들여 보자. 밀쳐 놨던 책을 다시 잡아 보고, 하늘도 한 번 더 보고 흙도 가끔은 밟아 보자. '자연미'를 느끼고 즐기고 감동할 수 있는, 그 감각이 희미해지다 못해 스러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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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수 2007.12.04 11:07
    도시는 뇌의 부산물이다. 도시는 뇌의 창의성의 표현이며 도시는 뇌가 신체는 언젠가 죽을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 죽음을 잊기위에 자연을 멀리 한다는 요로다케시의 말이 생각납니다. 결국 떠날 수 없는 자연인 몸을 사용하는 것중에 좋은 것은 걷는 것(이동, 운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TV 리모컨은 운동성을 최소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뇌의 부산물일것입니다. 뇌의 창의성과 창조성은 중요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연을 떠날 수도 없음을 생각해야 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에 있을 산행에 모두 동참하시는 것은 인간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자연을 만나는 것은 뇌의 꿈속에서 빠져나가는 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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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혁 2007.12.04 11:07
    동감 백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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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원 2007.12.04 11:07
    저도 <걸어서 세계속으로> 좋아하는데, 시간이 허락한다면 직접 가서 몸으로 느끼는 게 최고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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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경 2007.12.04 11:07
    시간도 허락해야 하고, 은행 잔고님의 허락도 받아야 하죠 ^^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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