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013.02.02 21:33

펌글, 역사에 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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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몇 개!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우주의 나이는 어떻게 될까요? 태양은 또 지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지구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생명은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암컷과 수컷이 섹스를 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인류는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넓고 넓은 우주에 외계 생명 혹은 인류와 같은 지적인 능력을 가진 생명체가 있을까요?

아마도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상식은 대개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이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이집트 문명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천 년을 이른바 '역사'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시각은 온당할까요?

생각해 보세요. 빅뱅(Big Bang)부터 시작한 우주의 역사를 하루라고 가정했을 때, 인간이 지구에 등장한 역사는 1초도 못 미치는 찰나에 불과합니다. 24시간 중에서 23시간 59분 59초를 생략한 채 나머지 1초도 안 되는 시간을 놓고서 감히 '역사'라고 이름을 붙여온 것입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욱더 아쉽습니다. 그간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설명할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비중 있게 다뤄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어떨까요? 최근의 연구는 기후, 지형, 질병 그리고 과학기술과 인간의 상호 작용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이런 반에 반쪽짜리도 못 되는 역사에 반기를 들면서 '모든 것의 역사'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우리가 공부해야 할 것은 단순한 '역사(history)'가 아니라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우리말로 '거대사'로도 번역되는 빅 히스토리는 약 137억 년 전의 빅뱅부터 인류의 현재와 미래까지 살피는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프레시안 books'와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위한 비전'을 찾는 <크로스로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과학 수다'는 이번에 이 불가능할 것 같은 프로젝트의 이모저모를 따져봅니다. '빅 히스토리는 무엇인가' 이 질문부터 시작한 이번 과학 수다는 빅 히스토리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한국 교육의 핵심적인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번 과학 수다의 주인공은 역사학자 조지형 교수(이화여자대학교)와 진화 생물학자 장대익 교수(서울대학교)입니다. 조지형 교수는 빅 히스토리 연구를 처음 시작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비드 크리스천 박사와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지구사연구소를 이끌며 국내외 빅 히스토리 연구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장대익 교수는 학문 간 융합의 최첨단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진화 생물학자입니다. 그는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몇 년간 조지형 교수, 또 천문학자 이명현 '프레시안 books' 기획위원과 함께 빅 히스토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 중입니다. 이들의 수다를 정리하는 역할은 '빅 히스토리 기자'를 꿈꾸는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가 맡았습니다.

자, 이제 수억 년의 시간과 수백만 광년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빅 히스토리의 세계로 들어갈 시간입니다. <편집자>


왜 빅 히스토리인가?

▲ 조지형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강양구 :
오늘은 이명현 선생님도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으니, 제가 주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우선 '빅 히스토리', 이 이름의 뜻부터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요. 역사학자인 조지형 선생님께서는 빅 히스토리를 '거대사(巨大史)'로 번역을 했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자면, 왜 빅 히스토리입니까?

조지형 : 그러게요. 스몰 히스토리가 아니라 왜 빅 히스토리일까요? (웃음) 사실 빅 히스토리에 대한 굉장히 잘못된 편견이 있어요. 이름 자체가 빅 히스토리이다 보니 마치 이것이 역사학의 한 분야처럼 인식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편견은 역사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죠.

사실 역사 자체는 인간이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연의 역사, 우주의 역사 등 세상의 모든 것에는 나름의 역사가 있지요. 그런데 역사 정확히 말하면 '역사학'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한 탓인지, 빅 히스토리라고 하면 첫 반응이 "미시사의 반대인가요?" 혹은 "거시사의 다른 이름인가요?" 이렇게 오해를 합니다.

여기서 확실히 말하건대 아닙니다. 방금 세상의 모든 것에는 나름의 역사가 있다고 했잖아요. 개인사, 가족사, 지방사, 민족사, 지구사, 자연사, 우주사 등. 빅 히스토리는 이 모든 것의 역사를 가능한 한 가장 크고 넓은 관점으로 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빅 히스토리 안에는 우주의 역사, 생물의 역사, 인간이 역사가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 빅 히스토리는 역사의 시작을 이 우주가 탄생한 '빅뱅'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또 현재의 역사를 살필 때도 인간뿐만 아니라 세균, 바이러스 심지어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것 그리고 인간이 만든 수많은 인공물 예를 들어 휴대전화 같은 것까지 염두에 둬야 해요.

강양구 : 그런데 원래 조지형 선생님께서는 미국사 특히 미국 헌법의 역사가 전공이잖아요? 미국 헌법의 역사를 공부하던 역사학자가 빅 히스토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역사학자가 빅 히스토리에 빠져든 얘기를 들려주면, 이 빅 히스토리의 개념이 더욱더 독자에게 와 닿을 것 같아요.

조지형 : 저는 한 번도 역사를 인간만의 소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대학은 물론이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이런 의문을 가졌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왜 역사학에서는 인간의 역사만을 다룰까?' 그래서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엉뚱한 작업도 했었습니다.

대학원을 다닐 때 쓴 학기말 리포트에서 미국의 우드윌슨 대통령 시기의 정치사를 스페인독감의 유행과 연결시켜봤어요. 일설에 따르면, 윌슨은 1918년부터 2년간 유행했던 스페인독감을 심하게 앓고 나서 그 후유증으로 쓰러져 죽었어요. 전국 순회 연설 중에 뇌졸중 유사 증상으로요. 스페인독감이 미국의 정치에 큰 영향을 준 거죠. 물론 이 리포트를 읽은 교수는 '이게 역사냐' 하고 타박을 했지만요. (웃음)

그런데 이렇게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역사를 제대로 살필 수 없어요. 미국 남북 전쟁(1861~1865년),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 등을 살펴보면, 총칼에 죽은 수보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일으키는 질병에 의해서 죽은 수가 훨씬 많아요. 예를 들어, 남북 전쟁에서는 사망자의 3분의 2에서 4분의 3이 질병에 의해서 죽었거든요.

그러니 인류의 역사를 제대로 다루려면 질병의 역사나 기후의 역사를 다루는 게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학은 그런 부분을 무시해왔어요. 인간의 역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과 맞물려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모든 것의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마땅하죠. 빅 히스토리에 빠져든 첫 번째 이유입니다.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설명하죠. 우리는 은연중에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합니다. 역사학자는 보편성/특수성을 따지죠? 그런데 이런 구분이 타당한가요? 사실 역사학자가 얘기하는 보편성이라는 건 '중세-고대-근대-현대' 이렇게 이어지는 서양사의 특징일 뿐이거든요.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을 나누는 이분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인간을 연구하면 인문학이고,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자연을 연구하면 자연과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자연을 구분하는 게 쉽나요?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과 자연은 떨어져 있는 게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어요.

심지어 지금은 인간/기계도 또렷하게 구분하기가 힘들어요.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컴퓨터로 글을 쓰다가 컴퓨터가 버벅거리면 그 순간 머리가 안 돌아갑니다. (웃음) 인간의 몸이 기계인 컴퓨터와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 결과죠.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통합되어 있어요.

이런 통합적인 관계에 주목해야 역사를 제대로 살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관계를 갖고서 상호 연결되어 있는가?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 빅 히스토리입니다. 빅 히스토리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저는 비로소 제대로 된 역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이명현 : 방금 조지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빅 히스토리의 그런 관점은 사실 과학자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관점입니다. 장대익 선생님께서 빅 히스토리를 처음 접했을 때 어땠나요?

▲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장대익 :
2008년쯤 학부에서 '자연과 인간'이라는 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었어요. 빅 히스토리를 접하기 전이었죠. 하지만 이미 저는 빅 히스토리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빅뱅, 우주의 시작, 원소의 형성, 지구의 탄생, 인간의 진화, 문명의 탄생과 발전을 한꺼번에 고려해야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요.

그래서 저는 빅 히스토리는 최고의 지적인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역사학의 한 분야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과학의 한 분야도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을 엮어서 인과 관계나 혹은 상호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 바로 빅 히스토리죠. 그리고 가능하면 그런 작업을 통해서 어떤 흐름이 있었는지까지 파악하는 거죠.

바로 이 지점에서 빅 히스토리의 또 다른 쓸모도 찾을 수 있어요. 조지형 선생님께서 빅 히스토리가 우리와 세상을 이해하는 넓고 깊은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어요.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빅 히스토리가 지혜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게 빅 히스토리의 두 번째 쓸모죠.

과거에 어떤 분수령이 있었고, 그런 분수령을 계기로 어떤 흐름이 지속되어 왔는지를 파악하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갈지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빅 히스토리는 정말로 시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지역, 지구, 우주를 포괄하는 학문 중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강양구 : 지금까지 말씀을 듣고 보니, 빅 히스토리가 왜 중요한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관점의 연구가 가능할까, 이런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장대익 : 맞아요. 역사학자 중에서도 조지형 선생님과 같은 분을 제외하고는 한국사, 미국사, 유럽사 혹은 고대사, 중세사, 현대사 이런 식으로 나뉘어서 자기 분야 외의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빅 히스토리는 역사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생물학, 지질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수많은 분야들, 더 나아가 심리학도 알아야 해요.

지적으로 엄청난 호기심을 가져야 하고, 그런 호기심을 직접 연구로 풀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춰야 합니다. 그러니 쉬운 작업이 아니에요. 결코 혼자서 혹은 소수가 모여서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고요. 그리고 저는 장기적으로는 '빅 히스토리(The Big history)'가 아니라 '빅 히스토리들(Big histories)'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빅 히스토리의 태동기이기 때문에 마치 이것이 하나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의 빅 히스토리들이 나올 거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지금까지의 빅 히스토리는 아무래도 인간 중심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다루지만 결국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고찰이 되거든요.

그런데 누군가가 나서서 아예 박테리아의 시각에서 빅뱅부터 현재까지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통찰까지 빅 히스토리를 쓸 수 있지 않겠어요? 저는 이렇게 여러 가지 빅 히스토리가 나오고, 그런 빅 히스토리가 서로 경쟁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애초 빅 히스토리가 의도했던 목적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명현 : 장대익 선생님의 말씀에 부연하자면, 과학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빅 히스토리에 대한 갈구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천문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별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별 먼지(스타 더스트, star dust)'가 생명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지요.

▲ <코스모스>(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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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는 이렇게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작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이건은 이 책에서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 신화에서 과학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빅 히스토리의 한 예를 보여준 거죠.

과학자뿐만이 아니죠. 한참 전에 결혼식이 있어서 부산에 갔다가 열차를 기다리기 지루해서 근처 만화방에 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다크북 펴냄)를 집었습니다. 그런데 1권을 펼치자마자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인 빅뱅부터 시작해 인간이 지구에서 진화해온 과정이 묘사되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또 다른 빅 히스토리죠. (웃음)

스토리텔링의 힘

조지형 : 벌써 다양한 빅 히스토리가 만들어질 조짐이 보입니다. 2012년 8월에 미국에서 제1회 국제 학술 대회가 열렸어요. 전 세계에서 빅 히스토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는 전체의 3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중·고등학교 교사 심지어 기업가까지 정말로 구성이 다양해요.

방금 장대익, 이명현 선생님께서 과학자의 관점에서 빅 히스토리에 대한 생각을 얘기했어요. 공감하면서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걸 한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 뭔가?' 누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저는 단연 '스토리텔링'이라고 답하고 싶어요.

근대 과학 혁명 이전에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 시도의 가장 오래된 결과물이 바로 세계 곳곳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 설화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과학적인 방법이든 인문·사회과학적 방법이든 혹은 신화적 상상력이든 인간과 세상을 연결하는 고유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왔어요.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 이른바 학문이 분화되면서 이런 스토리텔링의 전통이 파괴됩니다. 인간은 인문학, 자연은 자연과학 또 그 안에서도 쪼개지죠. 더 이상 '나는 어떤 존재인가?' 혹은 '나와 세상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흐름 속에서 인간은 더욱더 외롭고 왜소해졌어요.

전근대에 극히 드물었던 자살이 근대에 들어서 폭증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근대 이전에 인간은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엄청난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달을 수 있었던 반면에, 근대에 들어서는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는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으니까요.

저는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스토리텔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빅 히스토리는 인간과 세상 다시 말하면 인간과 자연을 연결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제공하는 학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빅 히스토리는 인류의 위대한 전통(스토리텔링)을 다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인 셈이죠.

장대익 : 인간은 결국 '스토리텔링하는 존재'라는 얘기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학자로서 한 가지 불만이 있어요. 왜냐하면, 상당수 인문학자들은 여전히 과학을 그런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공급하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신화와 같은 과거의 빅 히스토리와 지금의 빅 히스토리가 다른 점이 뭔가요?

이명현 : 과학의 존재죠.

장대익 : 그렇죠. 예전에 '번개는 왜 쳐요?' 하고 아이가 물으면 할머니가 "신이 하늘에서 벼락을 던지는 거란다!" 이렇게 답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대기 중에서 발생하는 정전기 현상이 번개와 천둥의 원인이라는 걸 상식처럼 알고 있어요. 감히 말하자면, 지금의 빅 히스토리가 가능한 건 과학의 '인푸트(input)'가 있기 때문이에요.

▲ <통섭>(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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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윌슨이 <통섭(Consilience)>(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을 쓰면서 이런 식의 얘기를 합니다. '계몽의 시대가 끝났다고? 천만에 이제야 제대로 계몽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무슨 말이야. 계몽은 실패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미완의 프로젝트일 뿐이야.'

빅 히스토리야말로 이런 미완의 프로젝트를 완성시켜보려는 시도가 아닐까요? 그리고 근대 이후 축적된 과학이 바로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고요. 그런 점에서 '과학은 단순히 지식을 제공하고, 그것을 스토리텔링으로 엮는 건 인문학이다' 이런 시각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빅 히스토리의 스토리텔링 역시 과학이 감당해야 할 몫이거든요.

조지형 : 지금까지 인문학에서 스토리텔링을 강조해온 건 사실이지만, 빅 히스토리가 인문학 중심으로 흘러가는 데는 저도 반대합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아요. 장대익 선생님 지적대로 빅 히스토리의 중요한 부분을 새롭게 축적된 과학의 성과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축적한 스토리텔링의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사고 구조에 가장 부합하는 형식이거든요. 그러니 과학이 중심이 된 스토리텔링 역시 이런 전통을 계승,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즉 과학자들도 자신의 연구를 통해 축적한 과학 지식을 어떻게 스토리텔링 속에 녹일지 고민을 해야 한다는 얘기죠.

실제로 빅 히스토리를 공부하고 가르치다 보면 스토리텔링의 힘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과학 지식을 과학자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한 비전공자에게 전달하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더구나 빅 히스토리를 접하면서 공부를 하긴 했지만 저 역시 비전공자잖아요. 여기서 이야기가 힘을 발휘하는 거죠.

예를 들어 별의 역사 같은 걸 딱딱한 과학 용어가 아니라 이야기로 풀어서 얘기를 하니까 학생들이 훨씬 더 그걸 친숙하게 받아들여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A에서 B로, B에서 D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나 학생이나 바로 알게 되죠. '어, C가 빠졌잖아요?' 아직 공부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고, 정말로 C가 아직 연구가 안 된 공백일 수도 있죠.

공부가 부족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공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고, 연구가 부족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연구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거예요. 이야기가요! 이 과정에서 학문 후속 세대가 해당 분야에 뛰어드는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어, C 부분의 이야기는 내가 채워 넣겠어!' 이런 식으로요.

스토리텔링의 힘은 이뿐만이 아니죠. 이야기 자체가 지식을 체계화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제가 빅 히스토리를 얘기할 때, 자주 언급하는 게 '책장 이론'이에요. 자, 여기 큰 방을 꽉 채우는 책장이 있어요. 빅뱅, 별들의 탄생, 원소의 탄생, 지구의 탄생, 생물의 탄생, 인류의 진화, 문명의 시작 등…. 그 책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따라서 칸이 나뉘어져 있죠.

빅 히스토리는 이 책장에 지식의 책을 하나씩 꽂아보는 일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지식의 책을 꽂다 보면, 어떤 분야는 충분하고 어떤 분야는 부족한지 확인할 수 있어요. 그것이 인문·사회과학일 수도 있고, 자연과학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머릿속의 책장을 만드는 일이 바로 스토리텔링이에요.

강양구 : 그것은 일종의 '지식 지도(knowledge map)'을 그리는 데도 아주 유용할 것 같은데요.

조지형 : 맞아요. 실제로 해본 적이 있어요.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가상의 책장을 만들어놓고서, 해당 분야의 대가를 한 명씩 배치해 보는 거예요. 빅뱅을 연구하는 A, 초기 우주를 연구하는 B, 별의 탄생을 연구하는 C, 인류의 진화를 연구하는 D 이런 식으로 배치하다 보면, 일종의 한국판 지식 지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실망스러운 경험도 했지요. 생각보다 훨씬 더 공백이 많은 거예요. 예를 들어 '생명의 탄생' 이런 분야의 대가가 누굴까 궁금해서 수소문을 해봤더니 국내에는 그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과학자가 많은데 이런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니…' 하고 실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장대익 : 과학자들끼리는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놀라셨군요. (웃음)

▲ 이명현 '프레시안 books' 기획위원. ⓒ프레시안(손문상)
이명현 :
조지형 선생님께서 과학자도 연구를 통해 축적된 지식을 어떻게 이야기로 녹여낼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고요. 그런데 장대익 선생님이나 제가 걱정하는 부분을 한 가지만 덧붙여 볼게요. 과학 지식의 축적된 정도가 인문·사회과학자나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롭습니다.

지금은 우주의 역사를 놓고도 그 나이를 1퍼센트 오차로 따집니다. 지구의 나이는 거의 100만 년 오차 범위까지 좁혔고요. 전통적으로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인간 본성을 놓고도 과학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요. 예술은 어떻고요. 인간의 미(美)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과학 지식이 축적되었습니다.

장대익 선생님의 지적은 조지형 선생님께서 강조하는 빅 히스토리의 스토리텔링에 이런 과학의 관점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자신의 과학 지식을 어떻게 스토리텔링할지도 고민해야겠지만, 인문·사회과학자도 이제 과학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예요.

이런 상호 작용 없이는 야심차게 시작한 빅 히스토리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놓인 두 문화의 높은 벽만 확인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물론 누구보다도 자연과학의 성과에 관심이 많은 조지형 선생님께서 버티고 계시니 걱정이 덜 되지만요. (웃음)

콜라 캔의 빅 히스토리 : 빅뱅부터 쓰레기까지

강양구 : 세 분 말씀을 듣고 보니 한 가지 질문거리가 생깁니다. 빅 히스토리가 단순한 백과사전은 아니잖아요. 다양한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빅 히스토리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서 조지형 선생님께서도 계속 인류가 축적한 다양한 지식을 '엮고', 또 그 엮인 결과물이 '이야기'라는 걸 강조하시는 거죠.

이런 점에서 보면 빅 히스토리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개별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그걸 포괄하면서 엮는 작업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가 엮으려면 항상 어떤 관점을 가지고 엮을지가 필요하잖아요. 방금 세 분 사이에 흘렀던 약간의 긴장감도 도대체 어떤 관점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차가 아닐까 싶어요.

거칠게 구분하자면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할지 혹은 역사학자에게 익숙한 방법론을 적용할지에 따라서 다양한 빅 히스토리의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이런 시도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면 좋지만, 실제로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장대익 : 중요한 지적입니다. 역사학계 내에서도 실크로드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렇게 같은 학문 분야 안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있는데,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없으면 이상한 거지요. 다섯 사람이 모여서 빅 히스토리를 연구하다 보면, 극단적으로는 다섯 가지 관점이 충돌할 겁니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식의 충돌은 없어요.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빅 히스토리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도 소수고, 서로 다른 관점이 충돌할 정도로 빅 히스토리 연구가 활발하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분명히 중요한 논란거리가 될 거예요.

당장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조지형 선생님을 통해서 빅 히스토리를 접하고서, 이 분야의 선행 연구를 살펴보니 공유하는 몇 가지 전제가 있더라고요. 그 중 하나가 빅 히스토리가 전개하는 과정에서 '복잡성(complexity)'이 증가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화론을 연구하는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전제입니다.

왜냐하면, 진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복잡성'은 뜨거운 화두거든요. 복잡성이 증가했느냐 아니면 '다양성(diversity)'이 증가했느냐, 이런 물음은 진화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논쟁 주제예요. 그러니까 앞으로 더 많은 진화 생물학자들이 빅 히스토리 연구에 참여하면 이런 문제를 놓고서 큰 논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결과 빅 히스토리의 결과물인 이야기의 흐름도 달라질 거고요. 물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아직은 이 단계가 아닙니다. 지금은 각자가 연구해온 여러 가지 지식이 서로 떨어진 게 아니라 엮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지식을 엮었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정도죠. 물론 저는 이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조지형 : 다양한 관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되겠죠. 학문의 토대가 두터워질수록 논쟁이 많아지고, 또 논쟁이 많을수록 학문이 더욱더 발전하니까요. 장대익 선생님이 예를 든 것처럼, 실제로 여러가지 논쟁의 가능성이 있고요.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 논쟁이 많아지면 그 자체가 빅 히스토리가 발전하고 있다는 방증일 거예요.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나만 덧붙일게요. 방금 다양한 관점이라는 얘기가 나왔잖아요? 그런데 아까 장대익 선생님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 다양한 관점이라는 것도 아직까지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에요. 그런데 정말로 빅 히스토리가 발전해서 가능한 한 최대한 인간의 관점을 배제하려는 연구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리틀(little) 빅 히스토리'라는 게 그 단초를 보여주는 연구들이죠. 그건 뭐냐면, 박테리아의 관점에서 혹은 콜라 캔의 관점에서 빅 히스토리를 연구해 보는 거예요.

강양구 : 콜라 캔이요?

조지형 : 네, 콜라 캔의 원료가 알루미늄이잖아요. 콜라 캔의 빅 히스토리는 알루미늄의 기원부터 시작하겠죠. 알루미늄의 기원을 파고들면 원소의 탄생, 우주의 탄생까지 이어집니다. 결국 콜라 캔을 통해서 빅뱅부터 현대의 쓰레기 재활용까지 빅 히스토리가 완성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대안 교육은 빅 히스토리부터!

장대익 : 지금까지 너무 장밋빛 얘기만 했으니까, 제가 악역을 좀 맡지요. 빅 히스토리든 리틀 빅 히스토리든 그럴듯한 연구가 가능하려면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빅뱅, 인간의 진화, 과학기술의 미래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있겠어요? 칼 세이건 정도라면 모를까.

강양구 : 현실적으로는 공동 연구를 할 수밖에 없겠지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팀티칭이 불가피하고요.

장대익 : 그런데 공동 연구가 말처럼 쉽나요? 또 팀티칭 단계에 들어가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죠.

예를 들어 별의 탄생, 원소의 기원 이런 것을 강의한다면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지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녹아 있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합니다. 이것도 만만한 일이 아닌데, 심지어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는 장치도 마련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바통을 넘겨받은 사람도 마찬가지 어려움을 겪을 테고요.

그러니까, 빅 히스토리가 제대로 되려면 각 분야의 대가들 그리고 각 분야의 상호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일종의 빅 히스토리 코디네이터가 필요해요. 그런 팀이 있을 때 비로소 빅 히스토리 연구가 기존의 개별 학문과는 다른 성과도 낼 수 있고, 학생들에게도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진짜 빅 히스토리를 가르칠 수 있는 거죠.

조지형 : 장대익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분명히 있어요. 빅 히스토리를 처음 시작한 학자 중 한 사람이 데이비드 크리스천 박사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박사의 책 제목이 <Maps of Time>입니다. '시간의 지도'. 빅 히스토리의 목적을 잘 보여주는 책 제목입니다. 빅 히스토리는 지도입니다.

빅 히스토리는 빅뱅부터 현재까지 약 137억 년의 역사와 앞으로 올 미래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에요. 지도는 일종의 가이드잖아요. 내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한 분야의 대가라고 하더라도 다른 분야는 초보자입니다. 그런 초보자에게 전체를 대강이라도 보여주고, 다른 분야로 인도하는 역할이 빅 히스토리입니다.

빅 히스토리는 공유입니다. 학회에서 만난 빅 히스토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부분 3, 4년 전만 하더라도 자기 분야 외에는 문외한이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빅 히스토리를 접하고 나서 불과 몇 년 만에 이들은 관심의 폭이 굉장히 깊고 넓어졌어요. 물론 특정 분야의 대가 수준에는 못 미치겠지만, 개인으로서는 놀라운 발전이지요.

저만 해도 그래요. 저도 자연과학이 쌓은 여러 지식에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빅 히스토리를 접하고 나서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말을 섞을 정도의 실력은 됩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주변에 있는 지식을 훔쳐서 쓰고 있어요. 빅 히스토리를 통해서 일종의 지식의 공유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지요.

빅 히스토리에 관심이 많은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저한테 그러더군요. '선생님, 이거 학생들 상대로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웃음) 자기도 모르는 것투성이인데 학생들에게 빅뱅부터 현재까지 137억 년의 역사를 가르치는 걸 자조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빅 히스토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지도일 뿐이죠. 그 지도에 나온 커피숍의 커피가 맛이 있는지는 직접 그 커피숍을 찾아가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해당 분야에 좀 더 욕구가 있는 이들은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이런 쪽으로 파고들겠죠. 그리고 그들이 빅 히스토리로 돌아와서 좀 더 정교한 지도 혹은 전혀 다른 정보를 담은 지도를 새롭게 그리겠죠.

ⓒ프레시안(손문상)
장대익 :
그런데 어떤 처지냐에 따라서 편차는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방금 언급한 그 고등학교 선생님의 경우에는 빅 히스토리를 만난 건 축복이죠. (웃음)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에게 빅 히스토리는 누군가가 해주면 좋겠지만, 굳이 내가 나설 이유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연구랑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일단 빅 히스토리의 가장 큰 목적을 교육에 방점을 찍고 있어요. 방금 조지형 선생님께서 정의를 내린 것처럼, 자기 연구를 최대한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일이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거죠. 이런 지식의 공유에 많은 이들이 나서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빅 히스토리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편, 학생들 입장에서 빅 히스토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학생들이 빅 히스토리를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기보다는 일종의 태도를 배운다고 생각해요. 여러 번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세상의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그런 연관성을 인식하는 일이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거죠.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앞으로 그 학생이 어떤 학문 분야에서 무슨 연구를 하든, 또 사회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하든 큰 자산이 될 것 같거든요. 이렇게 개인과 세상,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눠보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도 좀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요.

강양구 : 그런데 빅 히스토리가 교육 외의 연구에도 자극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빅 히스토리의 관점이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거나 혹은 기존의 연구를 보강하거나 이렇게요.

장대익 : 물론 빅 히스토리의 관점이 연구에 어떤 영감이나 통찰을 줄 수 있겠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이르지만요. 다만 그런 자극도 상호 소통에 기반을 둔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때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한 소통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거예요.

조지형 : 글쎄요. 학문 분야마다 편차가 있을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빅 히스토리가 새로운 연구 주제를 제시한 경우거든요. 기존의 연구에서는 산업 혁명의 등장을 가져온 중요한 원인으로 인구의 증가를 꼽았어요. 인구 증가의 결과 석탄과 같은 화석 연료에 대한 수요가 나타나고 그것이 산업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찾아보니까 18세기 후반에는 오히려 인구가 감소해요. 그런데 인구가 감소하는데도 목재 즉 땔감의 가격은 증가합니다. 기존 역사학계의 시각으로는 설명을 못하는 부분이죠. 저는 기후에 답이 있다고 합니다. 1440년부터 1850년까지 지구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소빙기가 있었거든요.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유럽 등 곳곳에서 대기근이 있었죠. 그 결과 인구도 감소했고요. 추우니까 땔감으로 쓰이는 목재에 대한 수요는 폭증했고요. 그러다 목재를 대신할 새로운 자원인 석탄과 같은 화석 연료에 주목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기후를 주목하니 역사를 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이 가능해졌어요.

장대익 선생님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죠. 빅 히스토리가 활발하게 연구되면 그 결과로 이런 식의 새로운 자극이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리라고 기대합니다. 물론 그런 긍정적인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분야도 있고, 상대적으로 더딘 분야도 있겠지만요.

ⓒ프레시안(손문상)
이명현 :
빅 히스토리를 보면, 우주 과학의 한 분야인 우주 생물학이 생각이 나요. 우주 생물학이 지금 1세대를 넘어서 2세대로 갔거든요. 그런데 5, 6년 전만 하더라도 학회를 가보면, 1세대 우주 생물학자로 볼 수 있는 학자들의 전공이 다 제각각이었어요. 천문학자, 미생물학자, 지질학자, 해양학자, 심리학자 심지어 SF 작가까지.

그래서 학회를 가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꼭 천문학, 화학 등에 대한 기초적인 강의를 잠깐이라도 해야 했어요. 왜냐하면 그런 과정이 없이는 상호 소통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대학에 아예 우주 생물학과가 생겼고, 거기서 학위를 받는 학생까지 생겼어요. 당연히 이들은 체계적으로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인류학 등을 배우죠. 앞으로 빅 히스토리도 이런 식으로 발전하지 않을까요?

강양구 : 그렇게 빅 히스토리가 제도권의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정착하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장대익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빅 히스토리는 모든 학문 분야에 스며들어야 할 일종의 태도잖아요. 빅 히스토리 학과에서 석사, 박사가 나오면 또 다른 학문 분과로 고립된 채 남지 않을까요?

장대익 : 저는 빅 히스토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일 바람직한 것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학부 때부터 빅 히스토리를 배우고 나서 대학원에서는 자기 전문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모습이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그러니 빅 히스토리를 좀 더 깊이 고민하는 배움의 과정이 제도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설사 방금 얘기한 긍정적인 모습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분과 학문의 연계를 전문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부동산을 사고팔 때 당사자가 직접 만나서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지만,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하잖아요. 빅 히스토리 전공자가 중개업자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양구 : 일종의 빅 히스토리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는 얘기군요.

조지형 : 네, 필요합니다. 특히 지금 교육 현장에서 빅 히스토리에 대한 요구가 많아요. 그런데 빅 히스토리를 제대로 가르칠 인력이 거의 없어요. 빅 히스토리 교사를 길러낼 교육 기관이 반드시 필요해요. 실제로 빅 히스토리가 각광을 받으면서 외국에서는 그런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도 있고요.

강양구 :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도미니칸 대학 같은 곳 말이군요.

▲ <빅 히스토리>(신시아 브라운 지음, 이근영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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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형 :
맞아요. 국내에 빅 히스토리를 처음으로 소개한 책인 <빅 히스토리>(이근영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를 쓴 신시아 브라운이 교육학과 교수로 있는 곳이죠. 이곳에서는 약 250명가량이 1학년으로 들어가는데, 그 전체 학생 모두가 빅 히스토리 과목을 교양 필수로 들어요.

그리고 한 학기 동안 그 과목을 배우고 나서 다음 학기에는 '빅 히스토리를 통해 본 물리', '빅 히스토리를 통해 본 정치', '빅 히스토리를 통해 본 음악' 이런 식의 과목을 듣습니다. 그러고 나서 각자의 전공을 파고들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전공을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강양구 : 빅 히스토리 수업을 실제로 진행하면 재미있는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조지형 : 한 학기 수업을 진행하면 중간고사를 전후로 수업 내용의 성격이 바뀌어요. 왜냐하면, 빅 히스토리를 쭉 이야기하다 보면 중간고사 정도에 인류가 등장하거든요. 그 전에는 빅뱅, 초기 우주, 별의 탄생, 지구의 탄생, 생명의 진화 등 주로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존하는 내용입니다.

아무래도 교사가 문과 쪽이면 허점이 있잖아요. 그럼, 그런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아요.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정도만 되어도 해당 분야의 마니아인 친구가 있거든요. 이때 교사의 열린 자세가 매우 중요해요. 허점을 지적한 학생에게 아예 해당 분야를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를 주면 교육 효과가 상당히 큽니다.

물론 그렇다고 빅 히스토리 수업의 전반부가 자연과학 일색은 아닙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빅뱅을 설명하면서 세상의 시작을 근대 이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등을 설명하니까요. 세계 어느 곳이나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나?' 이런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 있잖아요. 우리가 신화라고 부르는 것이 그 답이죠.

장대익 : 제가 걱정하는 게 그런 부분인데요. 자칫하면 학생들이 근대 이전에 있었던 신화적 설명과 근대 이후의 과학적 설명을 똑같은 가치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과거의 신화적 상상과 근대의 과학적 지식은 인식론적으로 큰 단절이 있는데요. 이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조지형 : 글쎄요. 학생들이 그 둘을 같은 가치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우려는 과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신화를 무조건 폄훼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신화는 그 나름대로 고대인의 고도의 사유가 응축된 산물이거든요. 그걸 무조건 폐기할 게 아니라, 과학 이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빅 히스토리의 사유를 했었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실 인류가 계속 지금과 같은 문명을 유지하면서 발전한다면, 앞으로 수백 년 후에는 지금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과학 지식도 마치 신화처럼 인식될지 몰라요.

ⓒ프레시안(손문상)

이명현 : 지금 우리가 아는 과학 지식의 상당수는 앞으로 버려질 거예요.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근대의 과학적 인식론은 끊임없이 과거의 지식을 수정하거나 폐기하면서 발전하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새로운 과학 지식이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신화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도무지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죠. 바로 이게 근대 이전 인식론의 특징이에요. 그리고 저 역시 이런 식의 인식론이 여전히 우리가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장대익 선생님의 우려가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강양구 : 네, 여기까지!(웃음) 지금 세 분 선생님의 논쟁은 사실 과학철학의 핵심 논쟁거리 중 하나가 아닌가요? 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김명자 옮김, 까치 펴냄)도 떠오르고요.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기는 어려울 테니, 이런 견해차가 있다는 것만 독자들한테 확인시키고 넘어가면 좋겠어요.

장대익 : 한 말씀만 더 하자면, 중학생 딸이 있는데 학교에서 도대체 뭘 배우고 오는지를 생각해 보면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웃음) 저는 정말 학교 선생님들이 괜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지 말고 지금 축적된 지식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물론 일부 열심히 하는 선생님의 노력을 폄훼하려는 건 아니고요.

오히려 그 반대죠. 학교 선생님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 이런 회고가 얼마나 많아요? 그만큼 학교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선생님들이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교육을 하느냐, 이런 회의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유독 '그 선생님 덕분에 내 인생 망쳤다' 이런 회고가 많잖아요. 일단은 저도 여기까지! (웃음)

강양구 : 그러니 자꾸 대안 학교 얘기가 나오잖아요.

장대익 : 우리도 빅 히스토리 학교를 하나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웃음) 이게 농담만은 아니에요. 아이 때문에 최근에 우리나라 학교를 놓고 진지한 고민을 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는 교육 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비민주적인 학교를 민주적인 학교로 만들자' 이런 문제의식이 강했죠.

이제는 새로운 학교 만들기가 시작되어야 할 듯해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에 대한 관심이요. '과연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애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고 있는가' 이제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방금 대안 학교 얘기가 나왔지만, 여전히 자율성과 같은 민주주의만을 강조하지,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수업을 어떻게 제공할지는 관심 밖이죠.

조지형 :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 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교육이 굉장히 중요해요.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 이미 '넌 문과 적성', '넌 이과 적성' 이런 식으로 딱지가 붙여지잖아요. 그러면 아예 다른 분야는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아요. 이런 학생을 상대로 한 빅 히스토리 교육은 극히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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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 그 가능성을 찾아서

강양구 : 얘기를 다 듣고 보니, 여기 세 분의 책임이 막중하네요. 한국 사회에서 빅 히스토리를 거의 처음 시작하고 계시잖아요. 간단히 빅 히스토리와 관련한 자신의 전망을 얘기하면서 이번 과학 수다를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장대익 : 이론 생물학의 중요한 문제는 진화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에 대한 해석이에요. 진핵 세포의 등장, 암수와 성의 등장, 언어의 등장 같은 것이요. 이런 최초의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재구성해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빅 히스토리를 구성하는 뼈대이기도 하거든요. 이런 연구가 빅 히스토리에도 기여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최신의 연구 성과가 학교 현장에 있는 교사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도 기여를 하고 싶어요. 특히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학교 현장에서 바로 응용할 수 있는 대안 커리큘럼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죠. 아까 빅 히스토리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했잖아요. 저부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죠.

조지형 : 원래 제 전공인 미국 헌법의 역사는 계속 연구를 해야겠죠. 하지만 아까도 언급했듯이 최근 들어서 소빙기와 산업 혁명 등 이런 빅 히스토리의 관점의 역사 연구에 관심이 있어요. 그 중에서도 특히 에너지의 리틀 빅 히스토리를 한 번 연구하고 싶어요. 오늘 이 얘기를 길게 못해서 많이 아쉬운데요.

빅뱅, 태양 이 모든 게 다 에너지의 효과거든요. 그리고 생물의 진화, 문명의 탄생과 흥망성쇠, 생태의 변화도 모두 에너지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고요. 그래서 기후, 생태, 에너지, 역사 이 넷을 아우르는 빅 히스토리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해볼 작정입니다. 또 장대익, 이명현 선생님과 함께 대안 커리큘럼도 만들고 교사를 상대로 교육도 하고요.

이명현 :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과학이 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온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빅 히스토리예요. 언젠가 한국수사학회에 가서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계속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얘기를 하는 거예요. 과학의 발전이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 통찰을 수사학에 줄 수 있는데도, 거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지요.

저는 빅 히스토리가 이런 지적 풍토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과학이 문화로 들어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상황, 그게 바로 빅 히스토리가 만들어갈 우리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저도 그런 빅 히스토리를 만드는데 적지만 기여를 하고 싶고요.

ⓒ프레시안(손문상)

빅 히스토리에 한 걸음 다가서기
글 · 김서형 / 이화여자대학교 지구사연구소 상임연구원


최근 우리나라에서 융합 교육과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빅 히스토리에 대한 관심 또한 증가하고 있다. 빅 히스토리는 역사적 분석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를 137억 년 전 탄생한 우주의 시작인 빅뱅으로까지 확대시켜 전체적인 패턴과 구조를 제시하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규모와 상호 관련성을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새로운 역사 방법론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빅 히스토리는 문자의 발명과 기록으로 시작되는 역사 시대 그리고 인류의 등장과 진화로 설명되는 선사 시대를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춘 인문학적 역사 분석을 우주의 탄생인 빅뱅이나 별과 태양, 지구의 형성,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 등 자연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는 역사 분석까지 확대시킨다. 그리고 137억 년에 걸쳐 나타난 다양한 기원들을 과학적 지식과 근거들을 통해 살펴본다.


또 빅 히스토리는 단순히 분석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만 확대시킨 것이 아니라 빅 히스토리의 시각과 틀 속에서 전체적인 구조와 패턴을 이해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던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이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빅 히스토리야말로 오늘날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융합 연구라고 볼 수 있다.

▲ <거대사 : 세계사의 새로운 대안>(데이비드 크리스천 지음, 김용우·김서형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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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소통과 공존, 상호 관련성을 강조하는 빅 히스토리를 보다 쉽게 이해하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저서들이 도움이 된다. 우선, 빅 히스토리의 창시자인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거대사 : 세계사의 새로운 대안>(김서형·김용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 2009년)이다. 아쉽게도 이 저서에서는 빅뱅이나 별, 지구, 생명체 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단지 전편에서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라는 제목으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저서에 녹아 있는 빅 히스토리의 시각과 방법론을 통해 우리는 전체적인 구조와 패턴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 저서의 특징은 크리스천 교수가 고대-중세-근대라는 역사학적 시대 구분법을 넘어 다양한 인간 사회에서 나타난 보편성을 수렵·채집 시대-농경 시대-근대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사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크리스천은 인류 전체 즉, 호모 사피엔스 역사의 전체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날은 글로벌 시대이다. 너무나 다양한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전 지구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들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의 노력이 아닌 지구 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이 저서에서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인간 사회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공통점과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규모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빅 히스토리이다.

빅 히스토리에서 강조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신시아 브라운의 <빅 히스토리>(이근영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를 추천한다. 총 431쪽에 달하는 이 저서는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시간과 공간의 깊이'에서는 빅뱅과 지구, 생명체 그리고 인간의 등장과 수렵·채집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2부인 '1만 년 동안의 따뜻한 시기'에서는 농업과 도시, 네트워크, 산업화 등을 다루고 있다.

브라운의 저서가 지닌 묘미는 특히 2부에서 잘 드러난다. 농업을 시작하면서 나타난 인간 공동체가 복잡해지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녀는 매우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최초의 마을이었던 예리코(Jericho)나 차탈회윅, 수메르 인들의 우주관, 무슬림의 지적 문화 등은 우리가 이전에 어떤 세계사 저서에서도 전체적인 구조와 틀 속에서 총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부분들이다.

이 저서에서 그녀가 우주와 지구의 이야기를 다소 무미건조하고 단순하게 서술하고, 인간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말랑한 이야기들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떠한 저서에서도 한 권 속에서 우주의 역사와 지구의 형성 과정,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 인류의 시작과 복잡한 인간 사회의 발전을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는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브라운의 저서는 크리스천의 저서와 함께 빅 히스토리의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이다.


<Big History and the Future of Humanity>(Wiley-Blackwell 펴냄). ⓒWiley-Blackwell
크리스천이나 브라운의 저서가 인간 사회와 역사에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면, 프레드 스피어의 <Big History and the Future of Humanity>(Wiley-Blackwell 펴냄, 2010년)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빅 히스토리의 틀과 내용에 접근하고 있다. 이 저서에서도 우주와 지구상 생명체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스피어는 새로운 특징이 나타나고 복잡성이 증가하는 조건들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복잡성과 새로움이 나타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은 바로 골디락스 조건(goldilocks condition)이다. 이 저서에서는 골디락스 조건 속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특징과 속성을 지닌 다양한 현상들과 사건들이 발생한다는 논리적 흐름을 따라 137억 년 전 빅뱅과 원소의 등장, 태양과 지구의 형성,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 그리고 인류의 발전 등을 서술하고 있다.


스피어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에너지와 미래에 관련된 부분이다. 오늘날 에너지는 한 민족이나 국가 그리고 인류 전체의 미래를 전망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이다. 19세기 말부터 그 사용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는 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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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훈 2013.02.02 21:33
    학부에서 언어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초끈이론의 기수 위튼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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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태 2013.02.02 21:33
    <빅 히스토리> 지금 절판이죠. <시간의 지도>나 <빅히스토리> 다시 출판되면
    서울백북스에서 조지형교수님모시고 강연회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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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규 2013.02.02 21:33
    아이디어나 목적, 목표는 훌륭한 데 대표적인 융합과학인 뇌과학의 사례를 보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여러 학문이 체계적으로 설정되는 모양이죠. 빅히스토리라고 하지만 실제 연구를 어떻게 하냐는 거죠. 분과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 코디네이터 개념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제너럴리스토와 스페셜리스트 개념의 차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주생물학이 우주과학에서 빅 히스토리라고 예를 들었지만 진화생물학과 물리학, 공학을 합쳐 놓은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2005년 통섭에 이어 새로운 용어의 등장인 것 같습니다. 빅 히스토리의 개념은 당장 연구자가 평소에 생각하면서 연구를 해야하는 것 그 때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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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훈 2013.02.02 21:33
    결국 크기의 문제네요. 이 우주가 엄청나게 크다보니...세균은 또 엄청나게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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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용 2013.02.02 21:33
    위에 소개된 "거대사", "빅 히스토리" 말고 "아주 짧은 세계사"(제프리 블레이니 | 박중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07-16 )도 있습니다. 인류의 탄생 이전은 다루지 않고 역사 시대 이후를 주로 다루지만 국가나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거대사", "빅 히스토리"처럼 인류의 관점에서 본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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