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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by 조수윤 posted Oct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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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서평 - 조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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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낯선 나라 쿠바. 이 여정의 안내자는 베르길리우스를 자처하는 디렉또르 정이다. 마음속에서 사라져가는 쿠바를 지키고 간직하기 위해 무릎의 통증, 할배 유령, 두 마리의 개까지 거느리고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토끼를 따라 토끼굴에 떨어져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앨리스처럼 나는 그렇게 쿠바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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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을 때 카리브해 연안 지도를 배경으로 소개된 시가 있었다. 이 책의 전체를 완벽하게 하나로 보여주며 보물섬을 찾는데 나침반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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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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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빛과 소리가 따랐다.
색깔이 멋을 냈고 화음은 춤을 췄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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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불렀다.
해적선을 타고 온 그들의 다른 이름은 제국이었고,
보고 듣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제국은?
불만으로 섬을 오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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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병에 찌든 섬은 행복의 기억조차 잊어갔다.
그 무렵 밀림에서 수염 달린 사내들이 나타나 탐욕과 싸웠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 죽어가는 섬을 다시 살려냈다.
그리고 다시는 섬을 잃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상상력과 인내심으로 그들은 제국의 폭력에 맞서?
반세기 동안 자유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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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과 대륙 사이에는 대단한 섬이 있다.
나는 그 섬에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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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나는 자살한 미국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섹시한 처녀 귀신이 아닌 주정뱅이 할배 유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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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나는 꿈을 꾸고 글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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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을 읽기도 전에 작가님을 먼저 뵙고 강의를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영화감독이라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접한 채. 그러나 직접 만나고 책을 읽었을 때의 장점도 있었으니, 옆에서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읽혔다. 그래서 더 몰입도가 높았나보다. 첫 만남 이후에도 그랬고 책의 끝을 보고도 그냥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이 허접한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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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여행을 하고 책을 쓰셨다고 했는데, 1492년 콜럼버스의 발견부터 미국과 쿠바의 국교수교까지 그 시대와 범위의 스펙트럼이 넓고 깊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했는지 나열하는 단순한 여행기가 결코 아니다. 쿠바의 역사와 문화, 정치, 우리 사회와 개인,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돌아보며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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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로 가는 길의 서사를 사용하여, 잃어버렸던 긍정적인 상상력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입체식 구성의 로드무비. 배경 : 쿠바와 지구반대편. 등장인물 : 디렉또르 정, 하비에, 페페, 다리아나, 마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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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이후 지켜지지 않는 약속, 침묵의 분노와 절망감. 지구 반대편의 나라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 파란 바람이 일렁이며 그를 쿠바로 날아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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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신화의 주인공 체, 살아 있는 역사이자 전설인 카스트로, 헤밍웨이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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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인생을 걸고 목숨을 바쳤던 체. 혁명, 예술, 여자, 자유, 정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열정적인 혁명가. 상상력으로 시작된 변화는 그의 희생으로 영원해졌다. 체를 읽으면서 문득 떠올랐던 것. 감독님과 조금 비슷해! 얼굴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신 듯 하고 엄친아인데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니 역사를 바꿀지도 모를 인물로 나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이 땅의 운이 없는 인간들을 위해 결심을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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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적으로 유의미한 사건인 쿠바혁명을 이끌었던 또 한명의 인물 카스트로.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로부터 비롯되며 의식주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고, 가치관은 지식과 문화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믿고 쿠바의 보건복지, 교육 그리고 스포츠를 향상시켰다. 쿠바의 교육은 불필요한 경쟁보다는 건설적인 협력을 타인을 다스리는 방법보다는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추구한다. 제한된 교육에 길러진 대량생산품, 유통기한이 정해진 일개미로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내게 쿠바는 꿈나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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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명의 등장인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등장해서 서늘한 분위기 조성하고 금세 사라지는 헤밍웨이. 진짜 할배 유령의 모습으로 그를 만나고 교감한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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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방법으로 글을 쓰기도 하지만 게으른 탓에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다. 그런데 가방속의 필수품이었던 카메라를 언제부터 멀리하고 챙기는 것도 잊어 가고 있다. 변화도 없고 답답하고 지루한 프레임에 갇혀, 기록하고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 잡힌채로 찍어대는 사진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고 과감하게 그 틀을 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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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감독님이 마그다의 아들 페페와 사진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왜 찍느냐고? 글쎄, 찍을 때마다 다르지만 카메라 건너편에 있는 피사체와 대화를 하는 거 아닐까?... 중요한 건 명확한 의도를 갖고 대화를 해야만 오래 간직하고 또 누군가에게 전달할 만한 스토리가 나온다는 거야... 인내심을 갖고 관찰력을 길러서 말을 하다 보면 대화 실력이 늘지. 그래서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더 좋을 때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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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리, 색깔, 화음, 웃음이 가득한 감독님의 사진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구나. 그는 카메라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이야기 했을까? 그리고 또 이야기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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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산떼리아(Santeria) 무당에게 점을 보는 에피소드가 있다. “카메라가 당신의 눈이고 입이야.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손이야. 현실과 이상 사이를 그리는 그림. 마음속 카메라를 놓으면 안 돼요. 당신은 항상 답을 찾고 있어. 세상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냐. 쿠바, 사람, 고통, 마음, 인생, 쿠바는 당신이 찾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선물을 줄 거야.” 영화 인생을 결심한 이후로 마음속에서 영화를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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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었다. 뒤끝 많은 나는 이제 곧 그의 영화도 보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과 책과 영화가 따로 돌지 않고 앞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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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구 감독님은 유머감각이 있었고, 그는 ‘교양’ 있는 영화감독이자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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