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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인문 고전이 아닌) 현대 소설 몇 권을 잡았다. 요즘 한참 뜬다는 소위 베스트셀러 -알라딘에 무려 160여개의 리뷰가 달리기도 한 - 들을 읽으면서도 영 지루하다. 그러다가 머리에 번개 불이 탁 튀는듯 한 책을 만났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집착>. 즉시 그녀의 다른 책 <단순한 열정>까지 한 숨에 읽었다. 이러한 글을 무엇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소설도 수필도 일기도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없다. 기존의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이다. 무엇보다 냉혹하리 만큼의 정직함이 가히 충격적이다.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과의 불같은 연애를, <집착>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의 또 다른 남자와의 연애관계에서 촉발된 격렬한 질투의 감정을 파헤친 것이다. 충격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글이 허구가 완전히 배제된, 자신의 삶과 경험이 재료가 되어 사소한 세부사항까지 사실 그대로 재현된 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 뜨거운 열애의 감정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사건 수사기록과도 같은 치밀하고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쓴 글이다. 도덕적 판단에 대한 무관심으로만 치자면 마키아벨리 뺨친다.


작가에게 자신을 완전히 까발리는 이러한 위험스러운 글쓰기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즉시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에 관한 대담집 <칼같은 글쓰기>를 찾아 읽었다.


아니 에르노는 계획된 텍스트와 일기라는 두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고 한다. 16세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다시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내면일기요, 다른 하나는 글쓰기 일기이니 결국 3가지 종류의 글을 쓰는 셈이다. 텍스트는 어떤 총체성에 대한 숙고 끝에 세워진 계획으로 하나의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것이다. 반면 일기는 단지 실존의 어떤 흔적을 남기고, 특별히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도 없이 현상에 대해 무언가를 진술한다. 현재 진행 중인 것을 포착하고 곧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것들을 저장하는 장소이다. 텍스트가 변형의 장소라면 내면일기는 향유하는 장소가 된다.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가의 각오>에서 자신의 체험 따위는 구애받지 않고, 완벽하게 만들어낸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체험과 글쓰기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런데 내게 그것은 다시보기 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한다. 이미지와 말을 있는 그대로 따와서 묘사하거나 인용하는 것은 나로서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그것들을 실제로 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끊임없이 되새겨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모든 글을 상상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여 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글쓰기가 완전히 자전적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말하거나 ‘나를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조건이나 고통 등과 같이 더 방대한 어떤 리얼리티 속에서 ‘나’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로 개인-자전적이 아니라 사회적-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밝힌다.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총체적 탐구이고, 리얼리티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작업이며, 무엇보다 정치적 활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세상의 베일을 벗기고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기존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다지는데 이바지 할 수 있는 활동이다.


약간은 다른 글쓰기이지만, 글쓰기의 의미에 대하여 <그리스 비극에 관한 편지>에서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정신이 글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오직 글만이 말과 생각을 객관화시키기 때문이다. 말이 객관화되고 타자화 되어야만 말은 자기를 반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의 자기반성이야 말로 정신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글로 표현하지 않는 정신은 아직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는 정신이요,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자기에게 복귀하지 못한 정신이다.”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에 대해 언급하였다. 먼저 순전한 이기심 혹은 개인적 야심이나 허영심(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미학적 열정으로 인한 동기,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역사적 충동, 마지막으로 세계를 특정방향으로 몰고 가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으며, 어떠한 책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이 동기들은 서로 상충되기도 하고 시대마다 달라지기도 하지만 오웰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쓴 최초의 소설이 <동물농장>이었으며, <카탈로니아 찬가>,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 생활> 같은 작품들도 그에 못지 않게 정치와 예술이 아름답게 융합되어 보인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조지 오웰과는 다르게 표면상은 전혀 정치적이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글쓰기는 정치적 활동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문학은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작가의 상상계가 개입되는 순수 미학적 활동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보면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아름다운 무엇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엇을 우선으로 하고 싶어 한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아무런 구애 없이 평온한 상태에서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교직생활을 통한 물질적 안정에 힘입었다 한다. 반면 위에 언급한 마루야마 겐지는 안정된 수입은 필력을 느슨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샐러리맨 생활을 거부한다. 그는 작가로서의 팽팽한 긴장감을 위하여 어떠한 돈벌이도 마다하고 오직 소설로만 먹고 살자고 결의한 작가이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읽은 두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태도가 여러 가지 면에서 무척 대조적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는 것은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정의이다.
“말, 여행, 광경 등 그 어떤 수단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쓰면서 발견하는 것, 숙고 또한 홀로는 그 수단이 될 수 없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다.”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다시 사는 것이고 더 강렬하게 사는 것이다.


“오직 삶만이 있는 삶, 그 삶은 충분하지 않아요....”


일기조차 쓰지 않는 나, 나는 아직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는 정신이요, 진정으로 나 자신에복귀하지 못한 정신이며,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그래서 권태롭고 나태한 삶만을 살고 존재가 아닌지 문득 두려워 진다.

  • ?
    서지미 2009.06.02 00:42
    이런 글을 통해
    이런 책의 소개를 통해
    좀 다양하게,
    좀 진지하게 살아 가고픈
    개인적인 희망을
    직접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좋은 글, 정성스런 글
    늘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지수현 2009.06.02 00:42
    저도 그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 ?
    이정원 2009.06.02 00:42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박현숙 2009.06.02 00:42
    똑똑해 보이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싶은 욕망이 작가들의 글쓰기에서 큰 동기라고 조지 오웰이 지적했지만, 작가가 아니더라도 사실 이런 게시판에 올리는 글도 허영심과 자기 만족이 가장 큰 동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감사하다는 댓글을 몇 개나 받고 나니 도둑질 하다 들킨 것처럼 무척 낯 뜨겁네요. 이렇게 민망할 수가...
  • ?
    정인성 2009.06.02 00:42
    예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글쓰기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무게감 있게 다가 옵니다
    언급된 책들 다 읽어보고 싶습니다.
    멋진 글, 감사해요.
  • ?
    박현숙 2009.06.02 00:42
    작가에게 쓰는 스타일이 있다면 독자 또한 읽는 취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알라딘 리뷰 개수가 즐거운 독서를 보장하지 않듯이 제가 언급한 책들도 읽어 보시면 무척 실망 하실지도 모릅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는 그의 글에 경이를 느끼고 압도당했다는 신경숙의 추천사 하나만 믿고 읽었는데, 저에게는 너무나 지루한 책이었거든요.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자면 위의 책들 중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 ?
    서지미 2009.06.02 00:42
    박현숙선생님~~
    작가 아니 에르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글일지라도
    진실이 없으면.
    영혼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아름다운 허구일뿐.
    그런글은 별로 당기지 않는다 할까요.
    그런면에서 이번에 읽게된 아니 에르노 책들은
    딱 제 취향이더군요.
    어찌 되었던 진실.
    어찌 되었던 내얘기.
    어찌 되었던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찰.
    등등
    하루일과를 있는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내 일기장의 특징이기도 하답니다.
    이번에 만난 아니 에르노 작가의 글이 당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유월 보내도록 하지요.._()_..
  • ?
    박현숙 2009.06.02 00:42
    같은 책을 읽고 누군가의 공감을 확인할 때,
    이해 받지 못한다하여 상처받을 것이 아니었음에도,
    안도감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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