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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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문헌학이라는 말을 들어보는 사람의 수는 적을 것이고, 문헌학의 성과를 직접 볼 수 있는 사람도 적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전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문헌학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흔히 문명의 원형과 뿌리를 언급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그리스-로마(그리스어, 라틴어), 인도(산스크리트어), 중국(한문)의 고전들은 모두 사용자가 사라지거나 혹은 언어의 형태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오래된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러한 과거의 문헌들을 대상으로, 텍스트의 출처와 진위 여부로부터 시작해서 언어의 연구를 통해 그 문헌에 나타난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을 규명해나가는 작업, 그것이 문헌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이죠.

 

2.

인문학을 '텍스트를 통해, 텍스트에 표현된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헌학이 인문학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브루노 스넬의 책을 통해서 우리 회원님들이 일생에 한 번쯤은, 언어를 통해 표현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어렵고 힘든 작업인지, 고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인지 느껴 보시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누구나 해 보아야 하는 공부는 절대로 아니지만, 한 번 접해 본다고 크게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3.

보통 원전을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생소함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원전이 번역되거나 요약되고, 그것이 재진술되면서 원전은 해석되고 압축된 형태로 전해집니다. 그렇게 우리가 얻은 상식적인 견해는, 원전을 직접 마주할 경우 그 앙상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브루노 스넬은 자신의 책 전체를 통해서 서구적 정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어떻게 그리스 시대에 그 단초를 드러냈는가, 그 합리적 정신의 원형은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던 스넬도 호메로스의 원 저작을 읽을 때 우리가 고대 그리스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으로부터 호메로스의 세계가 얼마나 먼 것인가 지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호메로스의 세계는, 세련된 그리스 고전기에 나타난 논증의 세계(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비극의 세계(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는 달리, 꽤 투박한 세계니까요.

 

4.

호메로스의 언어에서 우선 지적되는 것은, 추상적인 일반적인 개념이 덜 발달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개념들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본다'는 뜻의 단어만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시각적 이미지가 눈을 통해 들어와 인지된다'는 뜻을 가진 일반적인 단어는 오히려 뒤늦게 나오고, '뱀의 눈처럼 노려본다'든가 '그리워하면서 하염없이 바라본다'는 식으로, 그 양태나 정서 등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단어들이 먼저 사용되었다는 거죠.

 

이것은 사물의 본질이라든가 원형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형이상학의 실마리를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것"(ousia, 본체)에서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로부터 거리가 먼 세계죠. 그렇다면 이런 개념틀을 갖고 있는 두뇌는 세계를 어떻게 지각할까요?

 

5.

이런 질문들의 즐거움을 더 심화시켜주는 것은 몸과 마음에 대한 호메로스의 개념들입니다. 가장 뜻이 넓은, 추상적인 일반 명사로서의 '몸'이나 '마음'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죠. 칼이 몸을 찔렀다고 할 때의 '몸'은 피부와 관련되는 단어입니다. 몸을 움직인다고 할 때는 '사지, 팔다리'를 의미하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구요.

 

여기서 우리는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서의 자아 관념,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통일체로 여기는 관념을 갖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언어/단어가 없다면,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맞닥뜨리면서 '언어-관념-세계'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만나게 되기도 하구요.

 

답은 읽어 보시는 분들이 찾으셔야겠지만, 호메로스 원전 꼼꼼하게 읽기, 가 없다면 이런 식의 질문은 던질 수도 없다는 겁니다. 문헌학이 갖는 힘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이죠. 우리는 번역된 해석본을 통해 많은 걸 놓치기 때문입니다.

 

6.

모두들 낯설고 어려운 텍스트를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때문에 기존의 회원분들의 참여가 저조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다음 텍스트는, 훨씬 재밌고 쉬울 겁니다. <파우스트>를 통해 '모더니티' 읽기거든요. 이번 1기 인문 고전 읽기 모임의 모토가 "읽는 힘을 기르자"(라고 저혼자 정한 것이지만)라고 한다면, 그 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텍스트가 될 것입니다.

 

중간에 빠지셨던 분들, 꼭 오세요. 이 책, 쉽습니다. 재밌기도 하구요. ^^;;

 
  • ?
    박현숙 2009.03.06 23:31
    일찌기 사포는 에로스를 고통스럽고도 달콤하다고 표현하였고
    로미오는 줄리엣과 헤어짐을 달콤한 슬픔(sweet sorrow)이라고 하였지요

    문헌학 또한 달콤한 고통? 혹은 쓰디 쓴 달콤함 일까요?
    아직 그 달콤함까지는 맛보지 못했지만 얼마나 많은 고전들이 수많은 문헌학자들의 고통(?)속에서 태어났는지 조금은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대성의 경험', 마샬 버만,
    서론을 먼저 읽으면 딱 덮어버리고 싶은 책입니다
    유럽의 근대 사상, 문학, 예술을 모두 광범위하게 포괄하여
    낯설고 생소한 인물,사건들이 대거 등장하여 기를 팍팍 죽이거든요
    모던시대에 살면서도 모더니즘이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은...^^;;

    어쨌든 버만의 책을 읽기 위해 괴테의 '파우스트'와
    도스토엡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었습니다
    (이 화창한 초봄의 토요일 오후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니...)
    그리고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내린다'라는 제목을 원문에서 확인 하고 싶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도 샀는데,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까지 합쳐 이 텍스트들이 모두 쟁쟁한 고전에 해당하네요
    공간적으로는 독일과 파리, 페테르부르크, 뉴욕까지 장거리 여행에 해당합니다.
    얼만큼 읽어내고 갈지 아직 미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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