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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67년 쇠태해가는 그리스에서 천명의 인질이 로마로 끌려왔다.


그중 폴리비오스는 그리스의 독립을 지키려는 마지막 시도이기도 했던

아카이아 동맹에서 기병대 사령관을 지낸자로 로마의 장군인 스키피오

한테 맡겨지게 되었다.


 

폴리비우스는 그후 40장으로 이루어진 "역사"를 저술했으며

그때까지의 역사기록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지중해 세계를

주로 다루었다면 그의 "역사"는 로마로 눈길을 돌린 그것도 실증적인 시각에서

초점을 맞춘 최초의 역사기록이 되었다.


 

역사 서문에서 폴리비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지간히 어리석은 게으름뱅이가 아닌 한 불과 53년만에 로마인이

 이룩한 이 위없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또한 어떤 정치체제 아래서 가능했는가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로마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아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탈출해 성공했으며 그후손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국한다.


 

 로마를 건국한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국정을 3개의 기관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왕과 원로원과 민회이다.

 즉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된다.


 

 로마의 독특한 통치제제를 보면

 로마의 왕은 왕이 곧 신인 이집트의 파라오는 다르고

 신과 인간사이를 연결하는 신관적 색채의 메소포타미아의 왕과도 다르다.

 또한 부유하고 유력한 일족의 우두머리 라는 느낌이 강한 그리스의 왕과도 달랐다.


 

 로마의 왕위는 세습하지 않았고 선거를 통해 뽑혔다.

 즉 로마의 왕은 군주라기 보다는 오히려 종신 대통령에 가까웠다.

 

 또한 로마는 추상적 사고를 장기로 삼는 그리스와는 달리

 비교도 할수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살게된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로마인의 성향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로마는 또한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폐쇄적이지도 않았다.

 로마인은 전쟁을 하긴 했지만 종교전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인간행동의 원칙을 바로잡는 역활을 법률에 맞겼다.

 그리고 로마인은 가부장의 권한이 매우강한 가정이었다.


 

 로마의 왕정은 기원전 509년 끝난다.

 그후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들어가는데  종신제인 왕의 시대가 끝나고

 임기1년의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다.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공화정은 왕이 집정관으로 바뀌었을뿐

 권력의 삼각구조는 그대로 존속한다 (집정관 - 원로원 -민회)


 

 로마시민은 항소권을 가졌으며 그들을 기원전 5세기 중엽 성문법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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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는 법치국가로서 선진국인 그리스에 시찰단을 파견한다.

 (기원전 5세기 중엽)

 


 아테네는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왕정이 귀족정치로 바뀐다.

 귀족출신인 9명의 통령이 1년 임기로 행정과 군사와 제사를 담당하고

 그 밖의 귀족들로 구성된 장로회의가 이들을 보좌했다.

 자유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가 있었지만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기원전 594년 솔론의 정치개혁은 그떄까지 빛을 갚지 못할 경우

 채권자의 노예가 되는 제도를 폐지한다.

 이것은 고대사회에서 최초의 인권존중의 사례가 되었다.


 솔론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아테네 시민을 4계급으로 나우었다.

 이들의 의무를 보면

 제1계급과 제2계급은 자기부담으로 군비와 군장을 갖추는 기병으로서

 병역에 종사할 의무가 있었다. (고대군대의 주력은 중무장 보병이었다)

 의무에 따르는 권리는 정부요직은 제1계급과 제2계급이 차지하고

 제4계급은 선거권을 갖되 피선거권은 갖지 못하도록 규정되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솔론의 개혁이 아테네를

 귀족정치에서 탈피시켜 폴리스라는 민주적인 도시국가로 탈바꿈 시킨것은

 분명하다.


 그후 아테네의 정치체재는 그야말로 정치 교과서 그대로여서

 우리에게 정치체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리스의 폴리스사회는 실제로는 뜻밖에도 배타적이었다.

 아무리 오랬동안 아테네에 살아도 외국인은 시민권을 얻을수가 없었다.

 경제나 문화분야에서 이루어진 자유화를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는 노예에 대한 처우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리스의 노예는 극히 드문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생노비였지만

 로마에게는 해방노예라는 제도가 있었다.


 

 도시국가 아테네가 인류역사상 처음인 민주정치를 확립할 무렵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였던 스파르타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걷고있었다.

 바다로 열린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반도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원전 1200년경 남하해온 도리아 민족이 선주민을 정복하여 생긴것이 스파르타다.

 정복자인 도리아인은 선주민과 동화되지 않았다.

 지배계급 과 피지배계급이 스파르타 만큼 확실하게 분리되고 분리된채

 지속된 폴리스는 없었다. 스파르타인의 유일한 직업은 군인이었다.

 스파르타인의 미덕은 용맹과 복종과 애국심이었다.

 


 그후 페르시아 전쟁은 격렬한 내분이 특징인 그리스역사에서는 드물게

 그리스전체가 단결하여 적과 맛서 싸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후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점검 강해지고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정점 강해졌다.

 이 두 강대국의 적대관계는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 이

 일어날때까지 47년동안 냉전상태로 계속된다.


 

 강적에 맞서기위해 일치단결했던 그리스가 적을 타도한 직후에

 델로스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분되었듯이

 온나라가 일치단결하여 승리를 얻은 아테네에서도 정치싸움이 재개되었다.


 

 흔히 말하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는 기원전 460년부터 기원전 430년까지

 30년 동안이다.  그럼 페리클레스 자신이 한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정치체제는 다른 나라의 제도를 흉내낸것은 아니다.

 남의 이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범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참여를 수호하는 정치체제 그 이름을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이 정치체제에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공적생활에 봉사함으로써 주어지는 명예도 세인이 인정하는 그사람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고 출신가문이나 성장과정에 따라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빈곤속에서 입신했더라도 나라에 유익한 능력을 가졌다면

가난하다는 이유때문에 그 길이 막히는 일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이 공사에 이바지할 길을 가졌으며

 또 사적인 생활에서도 나날이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의심이나 질투가 소용돌이 치는 것까지도

 자유라고 말할만큼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나날의 수고를 잊게 해주는 교양과 오락을 만끽하고

 경기와 제전을 해마다 정해진 날에 개최하고

 

주거도 쾌적하게 정돈하는것이 중요함을 잊지 않는다.


자녀교육에서도 상호간의 간격은 크다.

스파르타인은 어릴적부터 엄격한 훈련을 실시하여 용기를 함양하기에

힘쓰지만 우리는 자유의 기풍속에서 자라면서도 위가가 닥쳤을때는

 물러나는 일이 없다.


 우리는 시련을 대할 때에도 그들처럼 비인간적인 엄격한 훈련을 받은뒤의

 예정된 결과로서 대하지는 않는다.

 

 우리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결단력으로 시련을 대한다.

 우리가 발휘하는 용기는 관습에 얽매이고 법률에 규정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 개개인의 일상생활을 할때

 갖고 있는 각자의 행동원칙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질박함 속에 미를 사랑하며 탐닉없이 지를 존중한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지만 이것은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함일뿐

 어리석게도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일신의 가난을 인정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지만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함은 깊이 부끄러워한다.


 

 우리는 사적인 이익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공적이익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서 발휘된 능력은

 공적사업에도 응용할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자로

 여겨지지 않고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참으로 격조높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다.

 자유주의자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듯 싶다.

 2500년이 지나 인류는 진보하고 있을터인데도

 우리는 이 페리클레스처럼 간결하고 명쾌하며 품위있는

 연설을 할수 있는 지도자가 과연 누구인가.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저 멀리 로마에서 찾아와 1년동안이나

 머물렀던 세명의 로마인의 본것은 바로 페리클레스시대의 아테네였다.



 

 그리스인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로마인을 이해할수 없다.

 그러나 로마는 이 아테네를 모방하지 않았다.

 또한 스파르타를 모방하지도 않았다.


 

 이 시대의 로마를 누구보다도 자세히 기록한 리비우스조차도

 " 유명한 솔론 법을 필사하고 그리스 국가들의 현황과 법률 및

   그 성립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시찰단이 파견되었다." 고 썼을뿐이다.


 

 그들이 귀국한 뒤에 귀국한 사람을 포함한 열명의 위원이

 12표법을 만들었다고 적혀있을 뿐이다.

 

 어쩌면 세 사람은 자료를 남겼지만 그게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이 침입했을때 로마는 불바다로 변하여

 수많은 자료가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는 로마가 그리스를 흉내내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모방하지 않았다는 것도 결국 영향을 받은게 되지 않을까..

 

 이제 드디어 로마에도 질서를 중시하는 스파르타나

 자유를 중시하는 아테네와 다르면서도 이 두가지 이념을 양립시킬수

 있는 진보된 정치체제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고 쓰고싶지만

 역사적 사실을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화정 로마는 그후 100년이 넘도록 로마를 양분하게된

 귀족과 평민의 대결이 그것이다.

 

 기원전 494년 평민계급의 이익과 권리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전임관직

 호민관을 창설한다.

 

 로마귀족들은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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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쇄태

 

 로마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입으로 자신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정면으로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죽은뒤 아테네는 과두정치파와

 민주정치파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재개된다.

 

 방향을 잃고 헤맬줄 밖에 모르는 아테네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학문세계에 틀어박히는 플라톤

 

 또한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를 피고로 하는 재판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아테네에 진주한 스파르타군은 패배자인 아테네에게

 민주정치를 버리고 과두정치를 이행할것등을 요구한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패권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힘이라고는 군사력 밨에 갖고 있지 못했던 스파르타는

 강국이 될수는 있었지만 패권국가의 자리에 계속 머물수는 없었다.

 스파르타인에게는 패배자조차도 납득할수 있는 생활철학이 전혀 없었다.

 스파르타인의 생활양식은 밖으로 수출할수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아테네는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국가로도 일급이었지만

 정치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리스를 이끌어갈만한 세력은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폴리스의 영광스러운 역사는 마침내 종말을 맞이한다.

 

 기원전 363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에 넘어갔다.

 마케도니아는 왕정이기 때문에 도시국가는 아니다.

 기원전 356년 그 마케도니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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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서는 로마

 

 켈트족 침입후 로마인은

 방위를 중시하면서 파괴된 로마를 재건할것

 로마에 등돌린 동맹부족과 싸워서 국경 안전을 확보할것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소하여 사회안정과 국론통일을 이룩할것 이었다.

 

 이 세번째 과제는 필연적으로 정치개혁을 의미하게 되었다.

 

   로마의 정치체제는 왕정도 아니요 귀족정, 민주정도 아닌

   이 세가지를 짜맞춘 정치체제였다.

 

   기원전 445년 로마는 귀족과 평민의 결혼금지를 해제하였으며

   평민계급에서도 인재가 배출되게 하였다.

   기원전 367년 로마는 평민과 귀족에게 전면개방을 택했다.

   국가요직을 완전개방한 완전한 자유경쟁이었다.

 

   선거결과 집정관은 둘다 귀족이 될수도 있었고 둘다 평민이 될수도 있었다.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도 귀족계급의 아성에서 벗어나 출신가문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해 나갔다.

   패배는 어디까지나 패배이고 중요한 것은 그 패배에서 어떻게

   일어섰는가 하는 것이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략에서 로마인은

  국론분열의 어리석음을 알았고

  로마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관계를 귀족이 평민을 끌어안는 관계로 바꾸었다.

 

  그들의 대외관계또한

  라틴동맹 -- 로마연합을 통한 패자까지 동화시키는 생활방식은

  종교와 정치체제, 대외관계에서 도로에 이르기 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개방적인 민족성향을 드러낸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 충격에서 겨우 일어선 로마가 이탈리아 중남부에서

  세력을 확립한 시기와 마케도니아의 풍운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에서

  풍운을 일으킨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그리스의 숙적은 언제나 페르시아 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완벽하게 쳐부순후에도 서쪽 로마쪽으로 가지앟고

  계속 동쪽으로 진군했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의 유쾌한 점이고 로마에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역사가는 애기한다

  iF  로마와 알렉산드로스가 싸우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들의 전쟁 조직과 개인의 대결이었을것이다.

 

  로마인은 느리기는 해도 착실하게 나아간다는 것이 그리스인과 다른점이다.

  정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일단 정복한 지방을 유지하는 데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로마는 패자에게 너그럽기로 유명했지만 모든 패자에게 다 너그러운 것은

  아니였다.

  패자는 처음에는 로마의 관용을 기대할수 있었지만

  두번째 이후로는 관용을 기대할수 없었다.

  명예와 신의를 중시한 로마인은 협약을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어 기원전 270년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폴리비오스의 역사 ,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거론하며

 

  로마가 융성한 원인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지 않은 세사람의 태도에

  주목했다.

  시오노 나나미 자신도 융성이나 쇄태의 원인을 감성적인 것에서

  찾지 않는 태도다.

  다시말해서 융성은 당사자들의 정신이 건전했기 때문이고

  쇄태는 정신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법은 그녀에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보다 융성의 원인은 당사자들이 만들어낸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분을 일신하려면 일신하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수 밖에 없다.

  즉 제도화 할수밖에 없다는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고도의 문화를 이룩한 그리스가 쇄태한 반면에

  로마는 계속 숭성해갔다 : 팍스 로마나 (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

  로마가 융성한 원인은

  종교에 관한 로마인의 사고방식이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로마의 독특한 정치체제 ; 집정관 제도를 통해 왕정의 장점을 살리고

  원로원 제도를 통해 귀족정의 장점을 살리고  민회를 통해 민주정의

  장점을 살린 로마 공화정의 독자적인 정치체제에 융성의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패자까지 포용하여 동화시키는 로마인의 생활방식

  이야말로 로마가 융성안 요인이라고 단언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 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은 아닐까..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개방성일것이다.

 

                                            --- 시오노 나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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