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10.02.14 00:49

철학과 삶의 조응

조회 수 1984 추천 수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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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신주(연세대 철학과 강사)


나와 친구를 이어준 관계의 흔적,


아장스망(AGENCEMENT)



 얼마 전 친구의 집에 들러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와 저는 학창시절에 거의 매일 붙어다녔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 관계를 조금씩 변화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하는 일이 너무나 달라서인지, 제 친구와 만나면 약간은 서먹서먹하기까지 한 기분입니다. 그도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저 역시 저의 관심사를 진지하게 토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나서 함께 했던 추억만 되씹어도 저와 친구는 행복했습니다. 사실 이런 행복감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활력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걸어왔던 아주 먼 길을 되돌아보는 기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드니까요. 그래서 그 친구를 다시 찾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밤은 깊어갔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공부방에 제 잠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뭐, 공부방이라고 해서 별다른 건 아니고요,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 책상과 의자, 전공 원서 몇 권과 함께 CD플레이어가 놓은 작은 책장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앗습니다. 낯선 방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이나 아니면 출판사 사람들이 자주 메일을 보내는 편이라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몇 개의 메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특히 그 가운데 한두 개는 답신을 피요로 하는 것이어서 키보드 자판에 손가락을 갖다댔습니다.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려고 하는 순간, 저는 야릇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자판 하나하나가 저의 손가락을 거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키보드를 칠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판을 계속 두드려 글을 완성해가는 가운데서도 이상한 불편함을 계혹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의 키보드는 제가 3년째 사용하고 있는 제 방의 키보드와는 확연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침내 자판에서 손을 떼고 키보드를 응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키보드가 제게 던져준 낯섦과 이상한 거부감에 대해 계속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생각은 낯섦과 마주칠 때 발생하는 법인가봅니다.


    친구의 키보드가 제게 낯설게 다가온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 키보드가 아니라 친구의 키보드였으니까요. '친구의 키보드', 그것은 바로 친구에 의해 길들여진 키보드를 의미합니다. 친구의 손과 팔, 근육과 그리고 친구가 앉았던 의자와 책상 높이 등, 그 많은 것들에 길들여 있는 것이 바로 친구의 키보드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저를 낯설게 만들었던 것은 키보드 자체가 아니라 그 키보드에 묻어 있는 '친구의 흔적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친구가 저의 집에 들러 제가 쓰던 키보드를 두드렸다면 그도 저처럼 어떤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두드리는 키보드에는 '저의 흔적들'이 묻어 있기 때문이지요.


 


 


    키보드에 묻어있는 흔적들, 저는 이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제 눈에는 저의 집에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키보드로만 보일 뿐이지요. 단지 저는 이 흔적들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키보드가 아니라 바로 이 흔적들이 아닐까요? 바로 이것들이 친구의 키보드와 제 키보드를 서로 달리 느끼게 해주는 지문(指紋)같은 것이니까 말이지요.


    생각을 거듭하다가 저는 제 가방에 들어 있는 책 한 권을 떠올렸습니다. 그 책에는 들뢰즈(G.Deleuze:1925~1995)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흥미진진한 생각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의 뇌리를 스친 개념은 '배열', '배치', '합성'따위를 뜻하는 '아장스망(agencement)'이라는 말이었지요. 서둘러 책을 꺼내 해당 부분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돼 있으며, 나이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multiplicite)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 '인간'-'동물'-'제작된 도구' 유형의 아장스망, 즉 인간-말-등자(登子)를 생각해보자. 기술자들은 등자가 기사(騎士)에게 옆 방향으로 안정성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군대 조직, 즉 기병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 이 경우 인간과 동물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것이고, 전자나 후자는 모두 변화하게 된 것이다. ("대화(Dialogue)")


 


    '등자'라는 용어가 조금은 낯설지요? 이는 말에 오르거나 말을 몰 때 발을 걸도록 만든 장치입니다. 이 등자가 발명될 때까지 전쟁은 주로 보병에 의해 이뤄졌다고 합니다. 등자가 없으면 말을 타거나 몰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자가 발명되면서부터 인간은 양발을 안정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었고, 한 손에 창이나 칼까지 들 수 있게 되었지요. 결국 전투 양상이 보병 전투에서 기병 전투로 혁명적으로 바뀐 셈이지요.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보병과 기병의 차이 또는 짐이나 나르던 말과 기병 전투에 사용된 말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보병은 기본적으로 땅과 연결돼 있거나 땅에 익숙한 군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리는 아주 강하고 굳건하겠지요. 이에 견주어 기병은 말과 연결돼 있는 군인입니다. 당연히 다리는 승마에 익숙하게 발달했겠지요. 이처럼 군인은 동일한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연결되느냐 말에 연결되느냐에 따라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변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런 변화는 말에게서 더 두드러집니다. 짐을 나르는 말과 전투에 참여하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짐을 나르는 말이 노새나 당나귀와 유사하다면, 전투에 쓰이는 말은 사자나 호랑이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전투에 쓰이지 않더라도 전쟁에 사용되었던 말은 자신이 태웠던 기병, 적진을 향해 돌격하던 힘 따위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더 이상 말을 타지 않는 기병 역시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했던 흔적을 갖게 되겠지요.


 


    들뢰즈의 아장스망은 이렇게 말과 인간이 연결되어 서로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는 이 아장스망을 '다중체(多重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아장스망보다는 이 다중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듯합니다. 우선 이 글자를 한 번 부수어 보면, '많다'는 뜻의 '멀티(multi)'와 '주름'을 뜻하는 '플리(pli)'라는 글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글자는 바로 '플리'입니다. 새로 산 옷을 입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주름들이 생겨나지요. 이 주름들은 옷을 입은 자신이나 외부로부터 받은 힘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결국 주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름의 논리는 보병이나 기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보병의 강건한 다리 근육은 땅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플리', 즉 주름이라고 할 수 있고, 기병의 그것은 말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주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자동차에 익숙한  우리들의 다리는 자동차에서 유래한 주름을 가지고 있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의 다리근육은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무척 허약한 것 같습니다.


    마침내 저는 친구의 키보드가 주던 낯선 느낌의 유래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키보드는 친구와 연결되었던 아장스망 또는 다중체였던 것입니다. 키보드가 저를 낱설게 했던 것은 바로 그 키보드가 친구와의 고나계에서 발생한 주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키보드분만 아니라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주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모든 것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주름을 만든 것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낯섦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갑자기 저는 어느새 많은 주름을 갖게 된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 가운데 한두 개는 아마 제가 만든 주름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주름은 제가 모르는 무엇인가와의 관계에서 생겨났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학창 시절에 절친했던 그 친구와 만날 때마다 문득 들었던 그 서먹서먹함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저와 잠시 헤어진 뒤 그동안 그와 관계했던 무엇인가가 만들어놓은 주름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친구는 학창 시절에 공유했던 추억들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추억들이 만든 또는 저와 친구가 함께 만든 추름은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니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졸음'이 밀려왔습니다. 이 '졸음'은 무엇에서 비롯한 '주름'일까 생각하니 실소가 흐르면서 머리가 아파옵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했나봅니다.


    잠을 청하면서 조그만 각오 하나를 해보았습니다. 내일 아침, 친구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저의 보이지 않는 주름들을 생각해볼 작정입니다. 그리고 상처처럼 그어진 친구의 주름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낯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낯선 것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최초로 말을 탔던 기병처럼 또는 최초로 인간을 태웠던 말처럼 말이지요. 낯선 불면의 밤이 지나면, 친구의 낯선 주름을 끌어안고 견뎌보아야겠습니다. 그래애 친구와의 새로운 아장스망을 구성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나 친구에세 새로운 주름, 소망스러운 주름 하나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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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록 2010.02.14 00:49
    아장스망,관계,다중체....오늘 게시판에서 얻은 상식의 발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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