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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 미술가의 삶과 죽음, 예술이 남긴 것…
부산 비엔날레 고 박이소 유작 전시…고독한 예술혼의 죽음 애도
 











부산시립미술관 옥외전시장 철탑위에 설치된 고인의 초대형작품 ‘우리는 행복해요'. 개인이나 집단의 진정한 행복의 의미는 물론, 과연 그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묻는 심란함과 함께 자신의 삶과 가치관에 대한 반성의 메아리도 생기게 된다. [사진 = 부산비엔날레]
“그의 재능은 시기할 수도 없었다”

지난 4월 세상을 훌쩍 떠난 한 미술가를 두고 미술계는 지금껏 그의 죽음이 주는 울림으로 술렁이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설치미술가 박이소(본명 박철호). 그의 작품은 현재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부산 비엔날레 현대미술전’(8.21~10,31)에서 미술평단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심장마비로 요절한 작가의 유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우리 미술계에 미친 영향이 깊고 넓기 때문이다. 박이소.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행적을 쫓으면 쫓을수록 그의 죽음은 더욱 짙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안타까운 감정은 이제 미술인들의 곁에서 미술애호가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그가 남긴 설치 미술작품, ‘우리는 행복해요(위쪽 사진)’.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부산 시립 미술관 광장에 설치된 이 작품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과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우리가 그의 삶을 다시 되짚어 보려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 예술을, 예술을 안고 있는 우리 사회의 품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절한 고독과 맞선 참 예술가를 받아들일 영혼의 곁방을 우리는 두고 있었는가. 그를 지켜봐온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요절한 미술가 박이소의 삶과 죽음, 예술을 들여다본다.


그의 귀국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가작가로 주목을 받았던 박이소의 생전의 모습. [사진 = 조선일보]
박이소는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뉴욕으로 건너가 12년간 작품활동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박모’라는 이름으로 33회의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했고, 뉴욕주 예술재단기금과 연방예술기금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주류 미술계를 흡수하는 대안 공간인 ‘마이너 인져리(Minor Injury)’를 직접 운영하며 제3세계 작가를 소개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히 한국인의 정체성과 전통의 실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형상화하는 작품 활동을 많이 했다.
박이소는 아시아계의 문화적 특수성을 이용해 미국 사회에서 문화적 주류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1994년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의 사회분위기가 나에게 은연중에 요구하던 복합문화주의, 소수민족, 이민자, 오리엔탈, 이국적인 것 같은 굴레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정헌이 한성대 회화과 교수는 “미국이 제3세계 국가에 허용한 문화적 혜택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인정받은 작가였고 계속 있었으면 더 유명해 질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돌아왔다”며 “그런 식으로 성공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3년 고인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밖에 설치한 '베니스 비엔날레'. 각목의 한 부분에는 참여한 26개국의 국가관과 아르세날레 건물 모형이 있다. 사진은 박현진 씨가 찍었다. [사진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박이소의 귀국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계원예술조형대 이영철 교수는 “그가 귀국한 94년은 한국의 모더니즘이 퇴조하고 광주 비엔날레가 시작되는 등 새로운 국제화, 세계화를 주도해 나갈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며 “박이소는 미국에서 활동을 많이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를 기점으로 그동안 한국 미술이 가슴으로 ‘느끼던’ 미술에서 언어로 ‘설명하는’ 미술로의 전환이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한 대학교수는 “그분이 처음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특이하게 카탈로그에 평론가들의 대담을 실어 현대 미술을 엄청 까발렸다”며 “솔직히 그 당시에는 내가 대학교수였음에도 그분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이 분의 그림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 공모전은 단순히 그림에 상을 줬을 뿐 그림에 담긴 미술을 평가할 정도의 이론적 배경은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후 박이소는 한국 사회의 날림성, 기저가 없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비판작업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삶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중단하지 않았다. 2002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했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0선’에서는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정헌이 교수는 “그의 미술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며 “기존 미술처럼 긴장하고 보기를 강요하는 미술이 아닌 누구나 자유롭게 다가와 느낄 수 있는, 뭔가 다시 생각할 수 있게끔 반성하게 만드는 미술이었다”고 평가했다.
부산비엔날레 박만우 큐레이터는 “고인은 ‘SADI(Samsung Art&Design Institute)’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가장 형식적이고 실험적인 교육자로 기억한다”며 “단순히 현대 미술의 흐름이나 주류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미술에 대한 포지셔닝을 가장 날카롭고 통찰력있게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재능은 시기할 수도 없었다”











2001년 설치한 'Today (at Yokohama)'. 전시장 바깥에 설치된 2대의 카메라가 하늘을 잡아 전시장내의 벽을 향해 프로젝트에 의해 투영된다. [사진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박이소는 국제적인 커넥션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내 작가로 통한다. 자연스레 사정이 열악한 한국 미술계에서는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미술계에서는 “그의 뉴욕 스튜디오를 거쳐가지 않는 한국 작가가 없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항상 뒤에서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줬을 뿐 결코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정헌이 교수는 “미술계에서는 누구나 그를 영원한 우군으로 느꼈지만 누구도 그의 외로움은 몰랐다”며 “그는 자신을 내세우거나 편을 만들지 않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고인과 함께 SADI에서 교수생활을 했던 박성환 작가는 “그의 재능은 시기할 수도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한번은 박이소가 액자에 원고지 한 장을 달랑 넣고 ‘창작자의 죽음’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박 교수는 이 작품을 보고 가슴이 파이는 충격을 받았단다. 박 작가는 “박이소는 언제나 함축적으로 현대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고 서양 사조들 가운데 우리는 어느 공간으로 나가야 하는가 등 언제나 한국 미술과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해 고민했었다”며 “아직 그에게 주어진 많은 일들이 남았는데 너무나 일찍 가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이어 “공식 석상에 작업복을 입고 나오고 누런 갱지로 명함을 만들어 나눠주는 등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했던 사람이었다”며 “한번 시작한 일은 철저하리만큼 완벽하게 처리했으며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한국의 아티스트는 죽었다”




유족들에 따르면 고인은 2004년 4월 서울 청담동 누나 집 2층 작업실에서 평소 좋아하던 재즈 음반과 포도주 병이 놓인 탁자 옆 소파에 잠자듯 앉아 숨을 거두었다. 주검은 화장했으나 유골은 장지를 구하지 못해 2004년 6월2일에야 경기도 파주시 기독교 가족묘에 안장됐다.

많은 지인들은 “고인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많이 힘들어 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패가 갈리고 중간에서 좀 튄다 싶으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회에 대한 절망, 이상한 편법이나 부조리를 보지 못 해 더더욱 신경쇠약과 통증으로 나중에는 자포자기까지 했었다”며 “또한 작품 활동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은 것도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고인이 평소 유족들에게 미술계쪽 얘기를 하지 않아 컴퓨터 메일을 정리하다 그의 죽음이 두달이나 지나서야 미술인들에게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그의 성정을 짐작케한다.

박이소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계원조형예술대 이영철 교수는 여전히 슬픔에 잠겨있다.
“아티스트는 물질적 풍요가 높아지고 야만의 사회로 바뀌고 있는 요즘의 현실을 비판하고 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아티스트는 무능하고 수동적이며 버림받은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박이소는 이러한 인간적, 사회적, 예술적 영혼을 회복시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멈출 수 없었을 겁니다. 오늘 그런 그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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