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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단절: 고야의 초상화 <페르디난도 7세>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는 서양 미술사에서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한, 파격적인 화법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교회의 독단적인 권위와 절대 왕권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과거 수 백 년간 유럽 미술에서 통용되어 온 미학적인 기준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영국의 화가 레이놀즈의 경우처럼, 예술에서 과거의 권위 있는 양식과 기법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을 중시한 신고전주의 화법이 왕립 아카데미의 규범이 되어 미술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에 반감을 가지고 회화에 정해진 규칙을 인정하지 않는 화가들의 작품이 분출하듯 미술사에 등장한다. 스페인 회화에서 대표적인 화가는 프란시스코 고야(1746.3.30~1828.4.16)이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는 기존 전통과의 단절을 보여주는 예로 고야의 ‘검은 그림’ <거인> 외에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가 소개된다. 그런데 왜 이 초상화일까? 당시 초상화의 주문자는 대개 귀족이나 왕족이었으니, 화가는 자신의 생존권을 쥐락펴락하는 까다로운 주문자의 취향과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재위 당시 왕의 초상화는 대개 왕권을 강화하고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주문되기 때문에 신고전주의의 엄격한 궁중화가 전통에 따라야 했다. 초상화는 그만큼 전통을 거부하고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하기 어려운 장르였다.


고야는 1789년 궁정 화가로 임명된 후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페르디난도 7세를 위해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1826년까지 직책을 맡았던 기록으로 보아 그는 궁정 화가로서 매우 장수한 화가이다. 고야가 일생동안 그린 초상화는 무려 350점에 달하는데, 왕실과 귀족의 초상화들은 <카프리초스>(1799년)의 그로테스크한 풍자화와 프랑스군에 저항한 스페인의 민중봉기를 그린 역사화 <1808년 5월 3일>의 스타일과 너무 달라서 한 작가의 것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1814년에 그린 초상화 <페르디난도 7세>를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회화 양식에 따른 초상화들과는 다른 점을 읽게 된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왕의 초상화인데, 우스꽝스럽다. 한쪽 발을 내밀고 비스듬히 선 자세에서 왼쪽으로 살짝 돌린 얼굴에 정면을 향하는 시선은 군주의 위엄이 없다. 눈매와 입가의 선은 아둔하고 허세에 차 있으며, 뭉툭한 윤곽의 몸은 뽐내듯 우쭐거린다. 섬세한 것이라곤 바지의 비단결과 궁중 예복의 금빛 장식뿐이다. 고야가 같은 해에 그린 다른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는 어떨까? 마치 사진관에서 배경과 의상만 바꿔서 찍은 사진처럼, 겉옷만 다를 뿐 얼굴 표정과 포즈가 동일하다. 예복의 비단 촉감과 금실 자수 장식을 화려하게 부각시킨 것 또한 같다.




                              
                                 

 


수석 궁정화가이던 고야가 왕의 초상을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었을까? 곰브리치는 “후원자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서양미술사에서 고야가 전무후무하다”고 평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왕의 초상을 이렇게 그리고도 어떻게 그가 궁정화가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을까? 혹 초상화를 의뢰한 왕이 자신의 형상에서 기이한 점을 알아채지 못했던 건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이 고야가 마지막으로 주문받은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였던 것을 보면, 왕은 결코 이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야의 초상화에서 페르디난도 7세의 모습은 1814년 로페즈(Vicente López y Portaña. 1772-1850)가 그린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와 비교해보면 실물과 많이 닮았던 모양이나, 전혀 다른 이미지이다. 고야의 후임으로 수석 궁정화가의 자리에 올랐던 로페즈는 신고전주의의 전통적인 양식에 따라 왕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미화하였고, 이 초상화에는 우스꽝스러운 군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고야의 <페르디난도 7세>에서 인물묘사 외에도 기이한 점은 또 있다. 초상화 배경에 배치된 험준한 산맥과 말들이다. 그런데 왜 말을 탄 기마상이 아니면서 굳이 배경에 험준한 산맥과 말들을 등장시킨 것일까. 산맥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이나 스페인 영내의 다른 산맥을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떼지은 말들은? 엄밀히 기마상은 아니지만, 기마상의 도상과 모티브가 거의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좀 엉뚱하지만, <페르디난도 7세>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의 기마상을 떠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기마상은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식화가’였던 자크-루이 다비드가 1800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이탈리아 원정길에 나선 나폴레옹의 하늘을 찌르는 기상과 정복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영웅의 초상화이다. 기마상은 로마시대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부터 군주의 절대적인 힘과 위풍당당함을 예찬하는 도상으로 통했고, 나폴레옹과 루이 14세와 같은 왕들은 그들의 절대 권위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마상 초상화를 만들게 했다.



그렇다면 고야는 페르디난도 7세의 기마상 주문을 어떻게 해결해야 했을까. 초상화를 주문받은 1814년은 페르디난도 7세(1784-1833)가 복위한 해였다. 그는 1808년 아버지 카를로스 4세를 강제 폐위시키고 왕좌에 올랐으나 두 달도 못되어 왕위를 내주고 프랑스에 유배된다. 1814년 안락했던 유배지에서 돌아와 복위하였지만 수년간 스페인 독립을 위해 싸워온 국민들의 바램과는 딴판으로 무능한 군주였으며, 교회와 종교재판소와 영합하여 전제 왕권을 휘둘렀다. 이런 왕에게 고야가 공감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1799년에 <카프리초스>에서 이미 부패한 권력을 비판하며 허영심에 찬 귀족을 당나귀로, 이런 귀족을 그리는 화가 자신은 원숭이로 조롱한 그가 아니던가.





                      





다시 고야의 <페르디난도 7세> 초상화를 살펴보자. 이 기마상 초상화는 구성 방식이 특이하다. 초상화에서 페르디난도 7세는 갑옷이 아닌 궁중 예복 차림에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한다. 장면이 전투 상황은 아닌 것 같고, 마치 말을 타고 산책을 즐기러 나온 듯 보인다. 하지만 배경의 험준한 산맥과 말들이 이런 왕의 형상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폴레옹 같은 영웅의 기마상은 아닐지라도, 말이 등장하는 왕의 초상화는 반 다이크의 <영국 국왕 찰스 1세>(1635년경)처럼 적어도 배경과 인물간의 상관성이 있어야 한다. 인물의 허리선 아래에 험준한 산들을 배치시킨 구도가 정상에 올라선 왕권을 상징한다고 왕에게 아첨할 수도 있으나, 이는 이제 막 유배지에서 돌아온 왕의 현실을 허황되게 과장하는 것이다. 배경은 상징적 의미 없이 장식적인 기능에서 부각될 뿐이다. 전통적인 기마상의 대상들을 고야식으로 배치시키면 오히려 영웅의 초상화를 요구하는 왕의 허영심과 예술적 몰취향이 드러나지 않는가. 과연 거장다운 화법이다.



기마상 도상의 정해진 대상들을 인물과는 무관한, 장식적인 배경으로 구성한 것은 고야의 다른 기마상 초상화에서도 특징적이다. 화가는 1814년에 그린 <페르디난도 7세> 초상화에 앞서, 1808년 막 왕좌에 오른 젊은 왕에게서 기마상 초상화 제작을 주문받아 완성한다. 이 그림 자체만 보면 약간 휑한 느낌은 있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그 의미가 확 달라진다. 이 기마상과 똑같은 형태의 미완성 그림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1751-1819) 왕비의 기마상은 배경이 똑같다. 하나의 배경을 고정적인 양식으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각기 다른 인물을 그려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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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1808년 초상화에서 왕이 입은 의상은 1814년의 초상화에서와 똑같다. 모자를 벗은 머리와 선 자세에서 앞으로 나온 배에 두른 붉은 허리끈만 다를 뿐이다. 배경과 의상만 같은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포즈와 형태 또한 동일하다. 고야의 유명한 그룹 초상화 <카를로스 4세 가족>(1800-01)을 보면, 이 그림의 중심인물인 루이사 왕비의 포즈가 <페르디난도 7세> 초상화에서의 인물 형태와 같다. 이런 형태에서 화려한 보석과 의상으로 치장한 왕비는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가 주는 인상과 유사하다. 허영과 속물근성에 찬 궁중여인의 모습이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정신쇠약으로 국정에서 물러나 사냥에만 열중하던 남편 카를로스 4세를 대신하여 그녀의 정부인 고도이와 함께 실질적으로 스페인을 통치했던 인물이다. 그녀의 허영과 지배욕은 영웅의 기마상 도상에 꽃을 단 모자와 승마복 차림의 왕비 모습을 대입시킨 초상화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영화 <고야의 유령>에 이 초상화와 관련된 재밌는 장면이 나온다. 왕비는 힘든 모델을 서면서 화가에게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여군주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고야가 이 그림을 처음 개막했을 때, 왕비는 획 돌아서 방을 나간다. 얼굴과 목 주름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그녀가 상상한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던 것이다.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고야는 특히 마리아 루이사 왕비에게서 초상화 의뢰를 많이 받았다. 다음 초상화들 속의 왕비는 허리를 콜셋으로 꽉 조여 여성적인 곡선미를 살린 의상에 깃털 달린 모자로 한껏 멋을 낸 포즈이다. 그러나 얼굴은 당시 삼십대 후반의 나이보다 훨씬 더 늙은 모습으로, 화려한 옷치장과 대비를 이룬다.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갖고픈 열망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왕비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상적인 초상화를 주문했지만 고야가 그린 것은 모두 똑같은 패턴으로, 공허하다. 1819년 왕비가 죽기 전, 고야는 비로소 그림 속에서 그녀와 화해하는 듯하다. 당시 그가 완성한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화와 비교하면 이전의 초상화들은 그림 주문자의 성격과 욕망을 드러낸 캐리커처임을 알 수 있다.





       
 

   

 상단 좌우 그림: <마리아 루이사 왕비>, 고야 1789년  
 하단 좌측 그림: <마리아 루이사 왕비>, 고야 1799년
 하단 우측 그림:  카를 4세와 루이사 왕비의 딸 <카를로타 호아키나 공주>,      
                        마리아노 마예야,1785 
                                                         



                            
                                       
                                               
                                                           <
마리아 루이사 왕비>, 고야, 1819년




고야의 초상화는 전통적인 회화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관습적인 의미가 해체된 작품이다. 배경이 장식적인 기능으로 전락되면서 인물과 연관된 상징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인물의 특징이 우스꽝스럽게 과장된다. 뿐만 아니라 초상화에서 반복되는 인물의 형태는 고전적으로 전형화된 이미지가 실제 모습과 얼마나 큰 괴리감이 있는지 보여준다. 실물의 단점을 감추거나 미화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일그러진 모습을 그려낸 고야의 초상화는 르네상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고전적인 회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근대적 예술의 새 지평을 열어준다.





[‘고야’ 관련 참고 도서]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02
고야, 영혼의 거울, 프란시스코 고야 지음, 이은희, 최지영 옮김, 다빈치 2011
고야, 박홍규 지음, 소나무 2002
고야(전4권), 홋타 요시에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2011
스페인 회화, 재니스 톰린슨 지음, 이순령 옮김, 예경 2002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고종희 지음, 한길아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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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덕수 2012.03.13 21:23
    너무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 ?
    류은희 2012.03.13 21:23
    반갑습니다.^^

    같은 내용의 글이 다음 카페에도 있습니다.
    http://cafe.daum.net/ANU2011
  • ?
    송은경 2012.03.13 21:23
    역시 가장 성실하신 류은희선생님 ^-^
    저도 발표자료 얼른 업로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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