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詩社

칼럼
2009.10.16 16:46

따뜻함과 서늘함에 대하여

조회 수 2823 추천 수 0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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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을 넘어 담양에 이르면 조선 중종 때 처사 양산보(1503-1557)가 심
혈을 기울여 이루어 놓은 소쇄원이 있다. 한국 정원의 진수를 맘껏 느껴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여름이면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 소쇄원 입구에 다다르면, 서늘한 그늘 속 저 멀리 애양단의 따뜻한 빛이 눈에 밟힌다. 그늘 속에서 따뜻한 토담장의 빛을 보는 순간 마음도 이내 푸근해진다.



"입구의 오솔길을 따라서 대봉대를 지나 좀 더 올라가면 애양단(愛陽壇) 마당에 닿는다... 이 북쪽 변방이 양지발라서 겨울에 계곡수가 꽁꽁 얼어붙을 때도 이 마당에는 햇볕이 자글자글 끓고 있다고 해서 애양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서늘함, 깨끗함, 헐거움, 성김, 그리고 성긴 숲 속의 어둑시근한 빛들의 풀어짐, 그런 느슨한 공간으로부터 양명하게 드러나는 빛들이 그리울 때 그 정원의 사내들은 이 애양단 마당을 찾았을 터이다."(김훈, 풍경과 상처)



겨울이면 스산한 나뭇가지 사이로 토담장은 자신의 몸체를 온전히 드러내어 온기를 뿜어낸다. 애양단이 그 자리에 있어 한기는 사라지고 몸속으로 온기를 전수 받는다. 따뜻함과 서늘함, 그 조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장소의 고귀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소쇄원 중심에 위치한 광풍각에서 느끼는 정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여름에는 애양단이 있어 서늘한 대청에서 따뜻한 양지를 멀리 두고 바라다 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지만, 겨울에는 마음과 발길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응집력 있는 공간으로 뒤바뀐다.


태양의 운행에 따라 제각각 다른 빛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지, 양산보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하루 중에도 아침 햇살은 한기가 느껴지고 오후로 갈수록 점차 온기가 더해지듯이, 계절마다 햇살의 기운도 제각각 달라 그 정감이 다른 법이다.

ㄱ자로 둘러쳐진 애양단 토담장은 주변과 경계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사광선을 받아내어 온기를 반사해내는 장치의 기능이 더 크다. 햇빛이 잘 들도록 뒤뜰을 돋우어서 장독대를 놓아둔다든지, 붉은 색 계통의 꽃나무를 심어 북쪽의 한기를 보완하려 하는 것처럼... 따뜻함과 서늘함, 그 공존의 미학!


만일 태양 고도에 따라 계산된 적당한 높이의 토담장이 없었다면, 햇살의 기운과 빛깔은 흔적 없이 땅으로 흡수되어버렸을 터. 태양은 소쇄원의 정경과 무관한 존재가 될 뻔했을 것이다. 이처럼 애양단은 햇살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런 훌륭한 지혜가 담긴 건축의 지혜가 우리나라 고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유럽 곳곳에서도 한기와 온기 사이의 공존과 대비를 절묘하게 이루어 놓은 명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시아 성 페쩨스부르그나 모스크바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내가 사진을 통해서 본 도시는 곳곳에 성당의 높은 뾰족탑 전체가 황금으로 칠해진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외관에도 불구하고 나는 솔직히 러시아 정교회가 그리스도교 정신과 어긋나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얼마나 경사가 심한지 꼭대기 높은 곳까지 올라가 고공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작업을 해야만 했었을 불쌍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국민 대다수가 빵 한 조각이 없어 살기가 어렵다하던데, 진짜 황금 칠이라면 저걸 팔아서라도 궁휼에 앞장서야 하는 게 교회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섣부른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은 현지에 직접 가보고난 후였다. 그 때가 8월이었는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음울한 기운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길을 지나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성당 황금색 첩탑이 눈에 들어 왔다.

놀랍게도 첨탑은 따뜻하고 안온한 빛을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스산했던 내 마음도 첨탑을 보는 순간 이내 수그러들었다. 보면 볼수록 고귀하고 고마운 빛이었다. 첨탑의 높은 위치도 위치려니와 황금칠이 아니었다면 반사되는 빛 속에 어떻게 온기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곳곳에 서 있는 첨탑들은 수많은 시민들에게 도시의 음산한 기운을 삭여주는 위대한 발광체로 우뚝 서 있으니, 이를 두고 어찌 사치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힘들고 어려운 이들의 위로자여야 할 교회가 저 빛으로 인해 교회다울 수 있으니, 명실 공히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순간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거기서 다시 한 번 한기와 온기가 상생하여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느끼게 하는 절묘한 조화를 뚜렷하게 목격하였다.

그 발광(發光)의 신비는 의외로 소박한 토담이나 금빛을 두른 첨탑에 있었으니, 정작 값비싼 것은 재료가 아니라, 자연 이치에 대한 이해와 응용의 지혜였던 것이다.
이 가을, 따뜻함과 서늘함이 교차하며 공존하는 오묘한 계절인 즉, 그 둘 사이 상보(相補)관계를 우리네 삶 속에서도 음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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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갑중 2009.10.16 16:46
    따뜻함과 서늘함,
    그 공존의 미학 !

    '햇볕이 자글자글 끓고.....
    어둑시근한 빛들의 풀어짐'

    내일 광주에서 강의 마치고 소쇄원 풍경 보러 갑니다.
    교수님 그림과 글 머릿속에 고스란히 담아 갑니다.
    벌써 초가을 빛깔이 빚어내는 소쇄원 풍경이 눈에 밟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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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준 2009.10.16 16:46
    아, 교수님께서 쓰신 글, 눈이 호사 누릴만큼 맛났다고 표현해도 부족하네요. ^ ^ 몇 번을 반복해 허기진 눈을 채워봅니다. 현장에서 사려깊은 눈으로 무언가에 대해 살펴보지 않고 함부로 제단하고 판단하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러시아의 황금을 두른 성당이야기를 통해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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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순 2009.10.16 16:46
    따땃한 토담장에 기대어 마음이 밝아지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황금뾰죽탑에 그런 미학이 있었네요

    금을 얼마나 많이 입히며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 얘기만 들었었는데

    페쩨르브르그로 수도를 옮기며 유럽을 가까이 하고 발전하려고 몸부림치며 실제로 왕의

    신분을 속이고 유럽 조선소에서 몇년씩 일까지 배웠던 피터대제

    불같이 화를 잘 내고 독했다는데 춥고 침침하고 무지했던 백성을 위해 일하다가 성질도

    나빠졌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유럽을 따라하며 사치가 심했던 페쩨르브르그의 1Km 가까이 되는 현재 미술박물관에 대해

    서도 건축적인 설명을 교수님께 듣고 싶습니다

    유럽의 건축들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았었는데....

    따뜻함과 서늘함에 대하여는 저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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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은경 2009.10.16 16:46
    서로를 의미있게 하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생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깊이 새겨야겠네요. 깊이있는 좋은 글 정말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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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석희 2009.10.16 16:46
    늘 김억중 교수님의 글은 느낌표입니다.
    그래, 그랬었지... 라는 생각에 다시금 마음이 저려옵니다.
    딱, 이맘때 느낄 수 있는, 을씨년스런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황금지붕의 따스함에 그런 묘미가, 배려가 있었음에 놀라게 되네요.
    아~그리운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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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종 2009.10.16 16:46
    이런...저도 모르는 사이에 창디모임이 훌쩍 지나가버렸군요~~~ 계속 참석하고 싶었는데,다음에는 반드시 가도록 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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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준 2009.10.16 16:46
    네, 유승종님, 2주 후에 뵙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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